우리에게는 아픈 가슴을 가지고 타락하고 변질된 이 시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어떤 고통을 가지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쓸데없이 내 인생에 개입하지 마시고 그저 내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주시기만을 바란다. 알라딘의 마술 램프에 들어 있는 지니처럼 말이다.
나는 사무엘상 말씀을 보면서 마음에 아픔을 느꼈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해서든 도덕적으로 죄 짓지 않고, 수치의 자리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몸부림치는 것을 귀하게 생각해왔다. 첩 안 두고, 성적으로 죄 안 짓고, 돈과 권력을 탐하다 도리어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말이다.
이런 애씀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모든 몸부림과 애씀의 주체가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내가 창피당하지 않고, 끝까지 좋은 목사라는 소리를 듣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좋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크리스천의 모든 애씀의 출발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걸 깨닫고 나자 내게 하나님의 애통하심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공감능력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공감 능력’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내가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에게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다. 심방을 가되, 그 성도의 아픔과 상황을 모르고 가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병문안을 가면서 그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의 눈물을 보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다녀오는 심방은 안 한 것과 똑같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한나를 대하는 엘리 제사장을 생각해보자. 한나는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나님께 눈물로 나아가 기도하고 있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 취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이런 엘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교회를 담임하는 입장에서, 무기력한 엘리의 모습이 혹시 나의 모습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고통스런 현실로 좌절하는 성도들의 눈물을 그런 식으로 치부해버린 적은 없는가?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어쩌다 엘리 제사장은 이렇게 둔감해졌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혔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님에게 상처 받았다는 성도들이 왜 이렇게 많아졌을까? 그런가 하면 성도들에게 상처 받았다는 목사님이나 사모님들은 왜 또 이렇게 많아졌을까? 한 이불 덮고 사는 부부 사이는 어떤가? 배 아파 낳은 자식과는 왜 이렇게 대화가 안 되는가? 왜 이렇게 불통이 되었을까? 이 모든 불통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혀버린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우리 내면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는 그때, 하나님과의 소통이 시작될 줄 믿는다.
† 말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로마서 12장 2절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 마가복음 12장 33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에베소서 2장 4, 5절
† 기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만 구하고 받기를 바랐던 저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저의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히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적용과 결단
당신은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와 늘 소통하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자 되기를 결단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