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고난 속에 산다.
수르 광야를 지나면 신 광야가 나오고 신 광야를 지나면 시내 광야가 나오듯, 골짜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골짜기를 맞이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산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긴긴 광야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천국에 도달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광야에서 기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인생이 곧 광야임에도 불구하고 내 힘으로 살기를 고집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는 일도 숱하게 겪는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울분의 화염으로 소중한 일상을 태워버리고, 자기애가 짙은 사람은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조급함의 굴레를 입고 버둥거리고,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은 스스로 정한 방식만을 고집하다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와 같은 실패의 길을 걸어봤기에 이제는 기도의 가치만을 붙잡아야 한다.
모든 일을 기도로 풀어간다면 이와는 다른 양상의 삶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기도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여정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일을 기도로 풀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한 마디로 내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전능자 하나님께 고하고 아뢰며 구하는 가운데 그분과 동역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의논하며 같이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기도자의 삶이다.
그렇게 살 때 엉킨 실타래와 같았던 내면의 문제도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해결받을 수 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다윗의 탄원시들이 좋은 예시다.
다윗은 그 시에서 내 속의 울분과 미움과 원수 갚고 싶은 마음과 공포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감추려 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쏟고 쏟고 또 쏟는다. 외적인 사건보다 더 중요한 내 내면의 고통을 하나님께 갖고 나아감으로 마음에서 먼저 하나님과 연합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윗의 시는 한결같이 보여준다.
이렇게 내 내면의 소용돌이가 하나님 안에서 정리되면 그때부터는 고난의 외적 문제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씩 해결받을 수 있다.
슬픔이나 절망에 휩싸이던 내 영혼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안정을 찾으니, 당면한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피할 길’과 ‘해결책’을 여쭈며 자신이 행할 바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여쭌다’라는 것과 ‘자신이 행할 바를 찾는다’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혹은 “길이 무엇인가요?”라며 엎드려 여쭙는 사람은 기도의 주도성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기도의 주도성을 스스로 갖고 와서는 “이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잖아요”라며 기도를 포기하거나 “하나님이 3일 내에 이런 방법으로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계신 줄 알겠습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이런 기도가 ‘기도의 주도성’을 자기 자신에게 둔 잘못된 기도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신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응답의 방법까지도 결정하고 제한하고 명한다면 그게 어떻게 기도이겠는가?
모두가 아는 대로 응답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느 시기에 어떤 방법을 통해 그 기도에 응답하실지에 대한 주권과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 이 세상 천지만물의 움직임을 다 보고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기도가 응답되는 방법을 아시고 그 길을 여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기도를 이끄시도록 자신의 기도를 내어 맡김과 동시에, 그분이 응답하시는 과정의 길 위에 순종으로 동참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하라 하실 때는 구하고, 가라 하실 때는 가며, 일하라 하실 때는 일하고, 기다리라 하실 때는 기다리면서 영적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가령 병에 걸린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면 낫게 하시기를 간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낫게 하시든 그 길이 최상의 길임을 믿고 나도 그 과정에 믿음의 순종으로 동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믿음이 좋다는 사람 중에는 ‘오직 기도만으로’ 낫기를 고집하며 기도 외에 어떤 노동도 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병원 치료만으로 병이 낫기를 바라며 기도로 세세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치유집회를 통해 낫게 하실 수도 있고(그러려면 집회에 가야 한다), 실력 있는 의사와의 만남을 통해 낫게 하실 수도 있으며(그러려면 병원에 가야 한다), 식이요법으로 낫게 하실 수도 있고(그러려면 날마다 음식을 연구하고 차리는 수고가 필요하다), 운동요법을 병행함으로 낫게 하실 수도 있는데(그러려면 땀 흘려 운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신 길들은 닫아버린 채 스스로 정한 한 가지 방법에만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실제로 조울증이나 조현병 같은 정신질환은 병원 치료를 병행하지 않으면 환자가 큰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병원 치료의 길도 다 막히고 식이요법도 할 수 없고 운동도 할 수 없을 때, 그럴 때가 아니라면 기도함과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주님께 여쭙고 순종으로 답하며 따라가야 한다.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면 언젠가 나도 그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한 영혼이 구원받기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들어야 함을 이해한다면, 나도 그 수많은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려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진실한 믿음의 기도는 언제나 ‘순종’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하나님이 기도를 만드신 목적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유발하는 존재’로서의 특권을 부여하시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가?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기도 행위와 노동이라는 행동을 통해 응답을 불러일으키신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행동’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다. 그 존재 자체가 너무나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려는 피조물들의 작은 움직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의 위대한 과정에 동참하는 특권을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자 또한 세상 방식대로 해결하려는 태도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나 역시도 지난 세월, 그와 같은 순종의 작은 걸음을 내디뎌본 일도 있었고, 순종하는 수많은 사람으로 인해 내 기도가 응답받는 은혜를 누린 일도 많았다.
피조물들의 순종을 빼고는 기도 응답의 역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그 광야의 한복판에서 수없이 목격하고 또 목격할 수 있었다.
-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한근영
† 말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 이사야 55장 8, 9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마태복음 6장 6절
† 기도
내 생각이 주님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주님의 방법이 늘 옳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행하는 자녀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적용과 결단
당신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신의 생각보다 더 높고 늘 옳으시는 하나님께 고하고 아뢰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녀가 되기를 기도하며 결단해보세요.
본 테마는 2022년 6월 2일 앙콜테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