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주는 힘으로 살았다.
삶은 거칠고 팍팍했지만 말씀은 달고도 건강한 음료 같아서 말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살아갈 힘이 생기곤 했다. 말씀이 내게 쉼이 되고 기도의 등불이 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세월이었다.
물론 나의 하루하루는 뒤처지는 체력 탓에 쓰러질 듯한 순간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차 안에서든 휴게실에서든 말씀을 읽고 묵상하거나 읊조리다 보면 그 말씀의 생명력이 내 안에 들어오고, 그러면 나를 집어삼킬 듯 엄습하던 피로감과 괴로움들이 걷히곤 했다. 말씀이 꼭 무더운 여름날에 마시는 생수 같아서, 말씀을 꿀컥 삼키면 다시 광야 뙤약볕으로 나갈 용기가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한 날, 내게 시험이 찾아왔다. 청소년기를 힘들게 보낸 뒤 어렵게 대학에 들어간 큰아들이 1학년 2학기를 보내다가 자퇴서를 내야 했던 일이다.
사실 나는 아들이 대학 한 학기를 다니는 동안, 이러다 아들이 일상으로 완전히 복귀할 수 있겠다는 꿈에 부풀었었다. 평소 재능을 보였던 미술 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내 교수님들의 칭찬도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운전해서 아들의 등하교를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즈음에는 아들 혼자 전철을 타고 다니는 등의 일도 차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2학기 들어, 수업하다 전화가 걸려와 데리러 와달라는 요청이 이어지더니 이윽고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상태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일반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 사람인가 봐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이 말을 하는 아들과 함께 자퇴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오던 날, 나는 안방 문을 닫고 하염없이 울었다. 소망하던 바가 좌절된 데서 오는 슬픔이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강한 아이들도 자신만의 뜻과 계획이 바뀌면 언제든 대학을 그만두기도 해. 아예 대학을 안 들어가는 아이들도 있고…. 우리 아이가 가야 할 또 다른 길이 있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이쯤에서 아들이 자퇴한 것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봐.”
“나도 알아. 그래도 오늘은 그냥 눈물이 나. 엉엉.”
어린 나이에 불안장애가 시작되어 아무것도 못 할 것처럼 힘들어하던 큰아들이 이만큼 자라 대학 근처에 가봤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서 담담히 아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그다음 길을 모색하며 격려해야 함을 알고는 있었지만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평범한 길, 표준화된 길을 가지 못하는 큰아들에 대한 엄마로서의 연민에 가슴이 찌르듯 아팠다.
그런 내가 안타까웠던지 남편은 내게 가까운 인천 앞바다에라도 다녀오자고 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막냇동생도 전화를 걸어와 “내일은 조카를 안 돌봐도 되니까 형부랑 언니랑 바람 쐬러 어디라도 좀 다녀왔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 전화를 받으면서야 나는 그간 내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스스로 실감이 되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일 하루 휴가를 주겠다는 동생의 말에, 그렇다면 내일은 하루 종일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 있겠다는 기쁨이 내 안에서 솟구쳤던 것이다. 내가 제일 편안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인 남편과의 데이트는 그런 다음에나 하고 싶은 일이지 결코 첫 번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아침부터, 온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성경을 펴 읽었다. 마침 호세아서를 읽을 차례였다.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과연 내게 뭐라 말씀하실지 귀 기울이며 성경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서너 시간 동안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동안 성령께서는 내게 일관되게 말씀하셨다.
너는 큰아들의 자퇴 때문에 울지 말고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를 위해 울라.
큰아들이 자퇴한 일은 하늘 무너진 것처럼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고 감사한 일이라는 느낌도 얹어주셨다. 내가 비통하고 슬퍼하며 울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떠난 이 세대의 음란함과 악함이기에 이제는 이 세대를 품고 중보기도하는 자로 살라는 소명도 일깨워 주셨다.
말씀의 힘은 정말 놀랍다.
말씀을 통해 진리가 분별되면 그때부터는 복잡했던 염려나 고민의 잔 줄기들이 사라지고 하나님 말씀의 한 줄기만이 뚜렷하게 부각되기 때문에 머릿속은 참으로 맑고 명료해진다. “Yes!”라고 화답하며 진리의 그 말씀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진다.
그날부터 나는 수년 동안 해왔던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처럼 학교에 정상적으로 다니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멈추었다. 학교에 잘 다니는 이웃집 아이들도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대신 우리 아이만의 기질과 특성과 능력에 맞는 직업과 길을 내실 하나님을 소망하며 이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말씀이 나를 기도의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말씀이 나를 진리에 거하게 함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이런 일들을 겪어서인지 나는 훗날,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의 책을 읽으며 “그가 하나님과 가깝게 걷기 시작한 것은 영감을 받은 말씀 속에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부터였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다. 잔느 귀용의 책에서 “기도를 배우려면 먼저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라”라고 강조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와 관련해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말을 하고 그렇게 말하는 가운데 기도라고 불리는 하나님과의 대화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 기도의 핵심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응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참된 기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건네시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말씀은 아둔한 우리를 깨워 기도할 수 있게 하고, 무지한 우리를 지도해 우리가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지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하다 보면 염려와 두려움과 원망과 슬픔이 뒤섞여 갈피를 못 잡던 그 전의 기도와는 다른 기도가 터져 나온다. 말씀을 가까이할 때 성령께서는 친히 기도할 말을 우리 입에 넣어주시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한근영
† 말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시편 19장 7, 8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시편119장 105절
† 기도
말씀을 늘 묵상하며 깨닫는 지혜를 구하고 주님께서 친히 기도할 말을 입에 넣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시는 그분 앞에 온전히 엎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 나아갈 때 위로하시는 손길을 경험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당신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기도할 말을 입에 넣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