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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재능 vs 아이의 꿈, 당신의 선택은?

꿈과 재능 중 선택을 해야하는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경쟁력 있게 살아가려면 자기만의 탁월함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살게 해주는게 부모의 역할인줄 알았습니다.
어릴때는 웃어만줘도 기쁨이던 아이가 세상속에서는 한 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아이가 되어버렸을때,
세상의 시선이 아닌 주님의 관점으로 볼때 이 아이의 소중함과 탁월함을 볼수 있는 시선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고 아이에게 하던 잔소리를 주님께 기도로 올려드리는 부모가 되면 어떨까요?(저도 이번 한주간 실천해볼께요~ )

아기가 태어나면 밤이고 낮이고 들여다보게 된다.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예쁘고, 눈이라도 마주치며 방긋 웃어주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이 충만했다.

건강하게 자라기를, 착하고 밝은 아이가 되기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기를,
책을 좋아하는 학자가 되기를, 자연을 탐구하는 과학자가 되기를,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를,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학자가 되기를, 선교사가 되기를, 목사가 되기를…

아이들의 타고난 재능과 그들의 꿈이 일맥상통하다면 앞길을 안내할 때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경우에는 내 탓도 크게 한몫했겠지만 일치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아이의 재능을 살리느냐, 꿈을 키우느냐 두 가지 선택 앞에서 하나만 택해야 하는 줄 알았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경쟁사회에서 자란 사람이어서, 타고난 재능이라도 제대로 살려야 아이의 인생이 조금은 유리하고 편할 거라는 지극히 세상적 사고방식에 젖어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꽉 막히고 답답하기 그지없어 보이는데, 그때는 내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

아이들의 꿈이란 대체로 허황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배움이 짧고 경험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부모의 눈에 가당찮아 보이는 것에 아이의 미래가 달렸다고 생각하면 꿈을 접고 재능을 살리라고 말하게 된다.

나는 안 그런 척하느라고 연극을 많이 했다.
속으로는 영락없는 속물이었지만 겉으로는 아이의 꿈을 존중하는 척하면서 아이의 생각을 바꾸려고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끝도 없이 설득하는 가면을 쓴 엄마였다.

왜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재능도 꿈도 키워갈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길러주면 좋았을걸.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없고 에너지도 빼앗긴다고 내 속에서 뭔가가 나를 조급하게 몰아세웠다.

잘하는 것을 실컷 하게 하여 일정 수준에 도달해보는 건 그것이 미래의 직업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 해도 아이에게는 귀한 경험이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성취도가 높아지면서 아이는 자신감도 쌓이고 즐거움도 컸을 것이다.
재능 있는 분야를 장래 직업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 해도, 여기에서 받은 에너지를 꿈꾸고 있는 것에 쏟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언제나 모두가 잘하는 건 아니니 서투른 시도, 잦은 실수, 답보 상태, 더딘 발전으로 지칠 때, 재능을 꽃피우면서 얻었던 힘을 끌어다 쓴다면 하고 싶은 것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이런 비밀을 알지 못했다.
둘 중에 뭘 선택해야 현명한 것인지만 고민했다. 온통 경쟁 중인 세상에서 내 아이라도 재능과 꿈 사이를 그네 타듯 오가며 인생을 즐기도록 도와줄 지혜가 없었다.

선택과 집중. 이 패러다임에 속아서 보낸 지난 세월이 아깝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 찬사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서 내 아이들에게도 은연중에 선택과 집중을 요구했던 것 같다.
선택과 집중은 나이 오십에 하니 안정적이고 딱 좋다.
아직 시간이 많은 그들에겐 선택하지 말고 집중하지 말고 오히려 도전하고 경험하라고 말하고 싶다.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을 알아가는 데 시간을 많이 쓰도록 도와주고 싶다.

인생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자신의 생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간다면, 어떤 꽃을 피우든 무슨 열매를 맺든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정답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좋아하는 것도 자주 바뀌고 잘하는 것도 그냥 잘하는 것뿐이지 그 이상의 감흥을 계속 주는 것도 아니다. 한때 즐기고 지나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에 큰 의미를 두어 그것으로 인생에, 나아가 세상에 획을 그어야 한다는 것도 지나친 성과주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강박으로 보인다. 꿈이 자꾸 바뀌는 것도 꿈을 못 찾고 있는 것도 크게 우려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뜨고 인생의 수많은 갈래길 중에서 하나씩 하나씩 접어갈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그래서 이 세대의 황당무계한 도전이 무조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가 관심 있게 바라본다면 젊은이들의 도전은 언제나 가치 있고 아름답다. 외로운 도전일 수는 있겠지만 무의미하게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전형적인 기성세대다. 도전과 경험은 전무하고 모두 책에서 보고 배운 것으로 인생을 쌓아왔다.
이렇게 살아온 게 너무 아쉬워서 되도록 아이들은 경험하게 하고 싶어서 도전해보라고 등을 떠민다. 우리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우리처럼 두려움도 많고 망설이고 주저하지만, 억지로 내디딘 도전의 발걸음이 돌아올 때는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본다. 그 얼굴을 보면 내가 간 것보다 더 기쁘다.
이런 경험이 현재와 가까운 미래를 준비함에 직결되지 않아도 아이 내면 어딘가에 에너지로 축적됨은 틀림없다. 언제 어디에서 그걸 꺼내 쓸지는 주님과 그만 아는 것이다. 그의 인생이니까.
<사랑하려고 산다> 최에스더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