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가 죽었던 시대에, 에녹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다. 일반적인 경건을 넘어선 어떤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동행’은 하나님과 뜻이 같아진 상태를 가리킨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 진리를 이렇게 압축한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 아모스서 3:3
동행은 같은 길을 같은 방향으로 걷는 일이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자기가 왕 되는 쪽으로 걸어간다. 돈을 쓰고 시간을 쓰면서도 그 돈과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좀처럼 묻지 않는다.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까닭은 곡물을 드려서가 아니다. 본질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화해의 방식, 곧 피의 제사에 가인이 동의하지 않은 데 있었다.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뜻이 같아질 수 없고, 그래서 동행도 없다.
반면 동행은 가던 길에서 돌이켜, 곧 회개하여 나의 방향과 목적지를 하나님의 것에 일치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동행에는 거듭남이 전제된다. 물고기가 사람과 아무리 친해져도 육지를 함께 걸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흑암의 권세에서 옮겨져 새 생명이 주어진다. 그제야 인격적 교제가 가능한 존재가 되고, 동행이 시작된다.
동행은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다.
에녹의 동행은 300년 이어진 삶의 양식이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잠시 방문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홀로 걷는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방문이지 동행이 아니다.
동행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드는 시간까지 삶의 사소한 결정과 걸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그분께 묻는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다.
17세기 프랑스 갈멜 수도원의 로렌스 형제는 이 지속되는 교제를 한평생으로 증언했다. 그가 원한 것은 고요한 묵상의 삶이었다. 그러나 맡겨진 일은 시끄럽고 고된 부엌일이었다. 처음에 그는 원망하고 불평했다.
그의 삶을 돌이킨 것은 단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일하는 시간과 기도하는 시간은 다르지 않다.”
냄비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란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음을 그는 발견했다. 그가 남긴 문장은 이렇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프라이팬의 작은 오믈렛을 뒤집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 불렀다.
거창한 훈련이 아니라 매 순간 의도적으로 생각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는 일이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감자를 깎으면서 그 하찮은 일을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행할 때 그의 부엌은 지성소가 되었다. 지친 수도사들이 그 부엌에 들어서기만 해도 평안을 느꼈다고 한다.
로렌스 형제의 삶은 동행이 일상의 과업에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업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임을 보여준다. 동행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느냐의 문제다.
에녹의 어떤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가?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렸기 때문인가?
다윗처럼 나라를 세웠기 때문인가? 성경은 에녹의 업적에 대해 놀라울 만큼 침묵한다.
같은 창세기 4장의 가인 후손들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도시를 세우고,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구리와 쇠로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나 에녹에 대한 기록은 무엇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이 거의 전부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 평범한 일상을 정직하게 살며 300년을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사람.
여기서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갈린다. 하나님은 화려한 경력이나 위대한 성취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릇의 크기나 가격이 아니라 그 그릇이 얼마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지를 보신다. 업적 한 줄 남기지 못한 평범한 삶이라도, 날마다 동행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다.
그 동행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가 곧 ‘믿음’이다.
믿음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영적 논리의 순서는 이러하다.
‘믿음 → 동행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잇는 뿌리다.
동행은 우리의 결심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 믿음이 일상으로 드러난 표현이 동행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그 열매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던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히브리서 11:6
첫째, 에녹은 “그가 계신 것”을 믿었다.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에녹의 믿음은 한 걸음 더 깊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믿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었고, 그분을 평생의 동반자로 여기며 살았다.
둘째, 에녹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이심을 믿었다.
상이란 무엇인가? 돈도 명예도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의 임재, 그분과의 친밀함,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함께함. 이것이 최고의 상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실제로 내 삶에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의 선하심을 알기에 나아가는 것. 이 두 기둥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동행이 가능하다.
오늘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하라.
그 삶이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숨이 끝나는 날, 우리의 걸음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에녹처럼 주님과 함께 걸어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 믿음의 DNA, 김다위
† 말씀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 아모스 3:3
† 기도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함께하심을 믿고, 그의 선하심을 믿으며 나아갑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 살기 원합니다.
† 적용과 결단
오늘 내게 주어진 삶 속에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익숙하게 행했던 것들을 회개하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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