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추억은 위기가 닥칠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된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부인했다. 그러고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쌓았던 모든 것을 허물어버리고‘더 이상 나는 이 생활을 할 수 없다’라고 판단하고 과거로 돌아갔다.
그런 그가 어떻게 회복되었는가?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만나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불러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과의 추억이 너무 많기 때문에 도저히 그분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 빠졌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베드로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물 위를 걷다가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어 물속으로 빠져버렸다. 그러자 주님이 손을 내밀어 건져주셨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_마 14:29-31
그때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서로 마주치지 않았겠는가? 베드로를 건져주시던 예수님의 눈빛이 어떠했을 것 같은가? 화가 나셔서 ‘이 골칫덩어리!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구나’ 하는 눈빛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물에 빠질 수밖에 없는 베드로를 향해 연민의 마음을 담은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셨을 것이다. ‘미안해하지 마라. 부끄러워하지 마라. 괜찮다. 내가 다시 건져주면 되지 않니?’ 하는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일생의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는 그 일이 주님과의 추억이 된 것이다. 베드로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때 주님의 그 눈빛을 말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닭이 울 때,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예수님이 그를 보셨을 것이다. 그 눈빛이 어떠했을까?
나 같았다면 실망의 눈빛을 보냈을 것이다. 증오의 눈빛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셨을 것이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라. 내가 미리 말했잖니. 넌 그렇게 약해. 그래서 넌 나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란다’라는 눈빛을 느낄 때 베드로의 마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평생 자기를 괴롭힐 수 있는 순간이 그 눈빛으로 인해 예수님과의 추억이 된 것이다.
우리가 ‘내가 얼마나 고결한가, 내가 얼마나 순결한가, 내가 얼마나 흠도 티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이다.
어떤 죄를 지었든 상관없다. 그 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과의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우리는 주님과 추억을 쌓아야 한다.
어려울 때, 고독할 때, 눈물이 날 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가 하나님과의 추억을 쌓을 시간이다. 그때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토해내야 한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 신명기 8장14~1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