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자체만도 고통인데, 가까운 사람의 찌르는 말들이 더 고통스럽게 한다.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친구가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고통을 더한다. 그들에게 악의는 없을지 모르나, 그들의 말들은 위로가 아니라 가시가 되어 박히곤 한다.
욥이 고난당할 때 욥의 고난을 더 가중시킨 것은 욥을 둘러싸고 있는 세 친구의 공격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다.
악한 사람들도 아니다. 선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친구를 위로하러 먼 거리에서 왔으며, 율법을 잘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만 옳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옳음을 강조하며 욥을 더 괴롭히고 있다.
엘리바스는 그의 두 번째 연설에서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고 악인을 정당하게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욥은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으로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 욥기 16:2
욥은 엘리바스가 한 말을 듣고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라고 탄식했다.
그들은 위로하러 왔지만, 결코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을 분석하고 해석하며 정죄한다. 그들은 실로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다.
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욥에게 공감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엘리바스와 세 친구는 욥에게 2차 가해자가 되었다. 욥이 겪고 있는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다.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정죄를 읽어보면, 엘리바스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전능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적인 언어는 마치 자신을 하나님의 전사, 혹은 하나님 자신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기독교인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타인의 고난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욥은 친구들과 옳고 그름을 논쟁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친구니까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더 많다. 친구여서 편하다는 이유로 더더욱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을 때, 상처를 주거나 받은 경험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재난을 주는 위로자인 것이다.
고난당하는 자에게는 재난을 주는 위로가 아니라 함께하는 위로가 필요하다.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보다 강력한 소리는 없다. 잠잠한 침묵의 소리야말로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을 깨우는 기상나팔 소리다.
- 고난극복 : 변나명용, 한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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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 로마서 12:15~16
† 기도
주님, 내가 먼저 주변 사람들에게 함께하는 위로를 주기 원합니다. 상황을 보며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기보다 편하다는 이유로 판단하거나 속단하여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고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먼저 구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그들 곁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 적용과 결단
오늘 내가 만난 낙심한 영혼에게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아닌 함께하는 위로자가 되어 주기 원합니다. 상황에 따라 수많은 말들이 앞서도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소망합니다.
† 함께 보면 좋은 영상 - 새벽 5시에 오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