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문을 품은 한 고등학생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남학생이 가진 의문은 이것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 분 같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라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간섭하신다면,
이 세상에 수많은 고통은 왜 있는 것일까요?
전쟁, 폭력, 가난, 전염병 등등.
차라리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믿거나,
계시더라도 세상을 그저 지켜보는 분이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인 것 같아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에서
사실상 세상에 관심이 없는 하나님,
아니 적어도 자신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하나님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예레미야도 한때 악의 문제, 악인의 형통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 예레미야 12:1
이 책은 바로 그런 고민과 기도 끝에 나오게 되었다.
어떤 인생도 가치 없는 인생은 없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전부 소중한 이야기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에는 기쁨도, 슬픔도, 즐거움도, 고통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그분의 섭리를 온전히 다 깨달을 수 없다.
특별히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당시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을 조성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은 인간의 선택을 배제하지 않는다.
단,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라 살며,
그 뜻을 선택하도록 힘써야 한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에 협력하는 일이다.
따라서 매 순간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선택이 중요하다.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의 영역을 벗어난 피조물인 인간의 선택이다.
이것이 세상에 고난과 고통을 안겨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일하신다.
예를 들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곳이 왜 하필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들어오는 그곳이었겠는가?
또 에스더서 6장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그 날 밤에 왜 잠이 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왕이 궁내 대신에게 읽게 한 것이 하필
모르드개가 암살 음모를 밝히고 공을 세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왕은 모르드개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를 높이게 된다.
불면증조차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데 쓰인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 같은 필연들이 모여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다.
책 <섭리하심_김다위> 중에서
★말씀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 시편 61:2
★ 묵상
#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기에
사고와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쓰레기더미에서도 꽃을 피우시는 분이십니다.
알 수 없는 상황속에 있다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 최선을 다하고, 유혹을 물리쳤지만
# 감옥에 끌려가는 최악의 상황
#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다.
# 다 이해하지 못해도, 주 신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