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도하는 제자 모임에는 나 같은 중년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들과 대화하며 성경 말씀을 나누다 보면, 공통된 고민을 발견한다.
제자 모임 중, 중년의 이삭(가명) 형제가 말했다.
“제 노후 준비는커녕 자식 등록금도 없는 상황에 어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요양 시설을 알아보니 생각보다 비싸서 엄두가 안 나요.
아직 대출금도 다 못 갚았는데, 빚을 더 얻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중년의 비슷한 고충들이다.
급변하는 시대 일에서 뒤처지지고, 처자식 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모셔야 한다.
자식의 결혼과 취업 후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을지 불확실 하고 가족과 소통도 잘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노년이다. 퇴직 후 20-30년 어떻게 대비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고 이런 가장의 마음을 가족이 헤아려주지 않아서 외롭다.
교회에서도 여러 프로그램이 있지만, 중년의 고민은 뒷전이다. 그래서 더 외롭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고통이 전달되어 속이 쓰렸다.
그들의 처참한 마음 상태가 선교지로 보였다.
나는 아저씨들의 고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화 중에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기 은퇴하고 직업 훈련이라도 받아보라고 할까? 아니면, 주중엔 바쁘니 주말에라도 사업 준비 모임 같은 걸 함께하자고 제안해 볼까?’ 그사이 대화가 한 바퀴를 돌았다.
그때 처음 이야기를 꺼낸 이삭 형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새벽기도를 시작했어요.”
이삭 형제는 불안함 때문에 이미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어느 것 하나 고통을 해소하거나 문제 해결에 확신을 주지 못했다.
불안과 염려로 잠 못 이루던 어느 새벽 4시, 그날도 그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자려고 할수록 잠이 달아났다.
안방 문을 살짝 열어 문틈으로 보니 아내는 자고 있었고 20대 중반의 아들은 온라인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살며시 문을 닫고 나와서,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럴 바에는 새벽기도라도 나가볼까….”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무작정 새벽 골목을 걸었다. 불빛을 따라 교회로 찾아갔다.
새벽 5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예배당엔 아무도 없었다.
그 앞에 가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기도해야 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그대로 눈물이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운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 참아온 눈물이. 그는 젖 떼인 갓난아기마냥 크게 울었다.
눈물이 잦아들 즈음, 뒤에서 새벽예배를 준비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슬그머니 맨 뒷자리로 가 앉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이삭 형제는 20년 만에 새벽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미안했다.
목사로서 아저씨들의 고민 앞에 새벽기도를 떠올리지도, 기도하자고 권면하지도 못한 채, 더 현실적(?) 도움이 뭐가 있을지 머리를 굴렸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기도하자고 먼저 말하지 못해서 부끄럽습니다.”
그때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말씀 같았다. 나는 성경을 펼쳐 그 구절을 읽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사 26:9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다. 사면초가의 위기 앞에서 그가 밤새 찾았던 해결책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구절에서 “간절히”로 번역된 히브리어 ‘솨하르’의 사전적 의미 중에는 ‘새벽’이라는 뜻도 있다. 선
지자는 칠흑 같은 영적 어둠 속에서 ‘새벽까지’, ‘간절히’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문제로 염려하던 그 밤에 이삭 형제는 하나님을 찾았고, 만났다.
그리고 여전히 새벽 순종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를 지키시고 그와 함께하신다(빌 4:6,7).
<새벽순종> 송준기
여러가지 노력을 해보았으나 어느 것 하나 고난의 문제를 해결에 확신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노력을 할만큼 했지만 지칠뿐 그에 따른 실망감이 더 켜져갔으니까요.. 하지만 제일 미련해 보이는 방법일지라도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간다면 주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은혜로 인도해주실 것을 믿으며 삶의 우선순위에 새벽의 제단을 놓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