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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

 2021-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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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결혼관은 ‘내 짝은 한 명’이라는 믿음, 즉 ‘이 사람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배우자’라는 개념과 믿음이다. 요즘 사회에 이혼과 비혼주의가 팽배하다고 해도 넌크리스천들 역시 자신의 배우자와 평생 함께 살 것을 당연히 여기며 그것이 옳은 사랑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신 배우자가 맞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대개 여자들이 결혼식 전날까지 ‘이 사람이 진짜 내 배우자가 아니면 어떡하나?’ 고민하지만, 사실 이런 고민은 성별을 떠나 누구나 한다. 혼자 고민하거나, 친구에게 상담하거나,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그 모양만 다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확인받고 싶어 한다. 자기 마음에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이혼했든 그렇지 않든 결혼생활에 만족감이 크지 않은 크리스천이 많다. 이들은 ‘확신 없는 결혼’, ‘응답 없는 결혼’을 해서 이런 현실에 처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지 않을까. 이 경우 자칫 하나님을 원망하기 쉬운데,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특정 상황에서 그런 확신을 가진 나 자신의 ‘분별 필터’가 오염됐다고 보는 게 더 성숙한 판단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지식의 결여 또는 그분에 대한 왜곡되거나 편향된 정보에 기인한다. 무지도 교만이다(그렇다고 “회개한다”라거나 “난 널 사랑하지 않았어”라며 이혼을 강행하는 건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를 신뢰하며 오히려 온전한 부부가 될 수 있도록 가정을 세우는 게 회개의 참된 열매이다).

이런 의미에서 확신도 교만이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변하지 않는 기준 즉 성경 말씀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독되지 않은 나의 ‘오염된 확신 필터’를 ‘성령충만 확신 필터’로 갈아 끼우라. 확신을 품는 마음의 중심을 바꿔야 한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면 말씀을 기준으로 사람과 상황을 분별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기 부인과 순종의 완벽한 하모니가 인생을 더욱 선하게 인도한다. 이런 사람들은 참 만족을 누리는 결혼생활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 즉 확신보다 확률이 중요하다.

세상적인 사람은 세상적인 것에, 거룩한 사람은 거룩한 것에 매력을 느낀다. 마음에 무얼 담고 있느냐에 따라 매력이라 느끼는 항목이 달라진다.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상대 이성이 갖는 외형적인 매력(얼굴, 몸매, 키, 패션 센스 등)에 끌린다.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상대의 재력이 주요 매력 포인트가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삼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육적인 매력 너머의 것을 볼 줄 안다. 물론 믿음 좋은 크리스천도 외모와 돈, 명예와 권력에 반응할 수 있다. 크리스천도 지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상대가 뭐 하는 사람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반응과 선택은 다르다.

이건 마치 자정 즈음 TV에서 라면을 먹는 장면을 봤을 때 입에 침이 고이면서 ‘나도 지금 라면을 끓여 먹고 싶다’라는 몸의 반응에 따르는 것과 건강한 자기관리를 위해 얼른 TV를 끄고 침실로 들어가는 의지의 선택을 하는 것, 이 둘의 차이와 같다.

음주와 유흥을 당연한 문화로 여기는 사람이 그것을 죄악시하며 최대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까? 아니다.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무의식적 영혼의 동경은 가질 수 있겠으나 그것 ‘때문에’ 이성적 매력을 느끼지는 않는다. 영혼의 색깔 이외의 다른 외적인 요소(호감 가는 외모, 반복 노출 효과에 따른 친밀도 상승 등)로 사랑에 빠질 수는 있겠다.

그러나 본디 세상은 예수의 영을 품고, 예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가는 우리 크리스천을 미워한다. 물론 크리스천과 결혼한 넌크리스천이 배우자를 잘 대해주고, 나름 잘 지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내 십일조 및 선교헌금 문제부터 자녀교육 문제, 주일성수 문제 등 복음생활을 고수하는 크리스천의 생활관과 삶의 방식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잦은 의견 충돌을 겪거나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결국 상대는 “내가 이 정도까지 배려했으면 너도 날 배려해줘야 할 거 아니야!?”라는 도덕적 상대주의 멘트를 날린다. 우리에겐 생명 그 자체인 복음이 그들에겐 배려해줄 수 있는 하나의 도덕적 옵션일 뿐이다. 이게 바로 예수를 존중하는 사람과 예수를 메시아로 따르는 사람의 차이다. 자기 감정과 자기 확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감내해야 할 현실 그 자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거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계발적인 삶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은 어떨까. 반기독교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긍휼한 마음이 들지는 몰라도 그 때문에 이성적 매력을 느낄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즉 자신의 복음적 자기계발은 결과적으로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할 확률을 줄이는 데 크게 일조한다. 꼭 연애와 결혼 문제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인간관계까지 정리된다.

삶이 심플해지고 담백해진다. 이 역시 보다 (복음적으로) 만족스럽게 살 확률을 높인다. 한 예로 독서에 맛을 들인 사람은 친구라 속고 있는 지인들과 카페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가십을 이야기하는 것’에 점점 흥미를 잃는다. 그보다 자기가 느낀 걸 공감해주는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데 매력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계층 이동’이다. 당연히 분별과 확신의 질감이 달라진다.

확신이 아니라 확률이다. 특히나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너무 쉽게 등가(等價)로 여기는 청년들이 자기 확신을 섣불리 하나님의 뜻, 그분의 섭리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다가 나중에 그 무지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를 본다. 조금 더 길고 신중한 호흡으로 성령의 열매를 살피며 ‘하나님의 뜻일 확률이 높다’, ‘하나님의 섭리일 가망이 크다’라고 여기는 편이 더 안전하다.

자칫 예비 배우자에 대한 확신을 구하는 마음의 동기가 예수께 기적과 표적을 요구하던 바리새인의 마음의 동기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나 자신부터 끊임없이 자기계발(=성화)에 힘쓰며 예수님과 일대일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이 되자. 그럼 어디 연애와 결혼뿐이랴.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주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덤으로 주실 것이다.
- 마 6:33

하나님의 생명 말씀은 내가 당신에게 유일하게 줄 수 있는 확신이다.

-책읽는사자의 신앙의 참견, 책읽는사자

† 말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 이사야 40장 8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 시편 37장 4, 5절

† 기도
주님께 끊임 없이 기도하며 친밀한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녀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으며 기도합니다.

† 적용과 결단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과의 친밀할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삶이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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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