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탐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정탐꾼과 달리 갈렙의 확신 있는 발언은
동요하는 백성을 진정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의 불신 가득한 발언은 백성을 다시 동요케 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_민 13:33
이것은 정탐보고가 아니었다.
그들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며, 자기들의 뜻을 백성들에게 설득시키려했다.
물론 갈렙의 발언도 정탐보고는 아니다.
그러나 갈렙과 열 명의 정탐꾼이 했던 보고는 그 내용이 완전히 달랐다.
왜 그랬을까?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신 1:3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신 1:26
이 두 말씀에서 갈렙과 열 명의 정탐꾼의 상반되는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와 불신의 차이가
그렇게 다른 내용을 말 한 것이다.
열두 정탐꾼 중 열 명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민 13:31
상대적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가.
패배주의는 상황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불신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자.
상대적 비관주의에도 빠져 있었으며 자신의 삶을 악평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열등감은 심각한 왜곡을 불러왔다.
사실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오히려 반대로 그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열 명의 정탐꾼이 본 상황이나 갈렙과 여호수아가 본 상황은 똑같았지만,
그 두 편에서 내린 각각의 결론은 지옥과 천국처럼 완전히 달랐다.
우리 삶도 이와 같다. 상황이 문제가 아니다.
결혼, 취업, 진로, 먹고사는 문제 등과 같은 삶의 정황들이
결코 우리 삶의 질과 내용을 결정짓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의 선택이다.
“믿음으로 선택하느냐, 불신으로 선택하느냐” 에 따라 기쁨을 얻기도 하고 슬픔을 얻기도 한다.
소망을 얻기도 하고 절망을 얻기도 한다.
사랑을 얻기도 하고 미움을 얻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갈렙, 여호수아 vs 열 명의 정탐꾼’이라는 2:10의 선택 앞에서 숫자적인 우위를 보고 열 명의 정탐꾼 쪽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당신은 어떤가? 모두들 “이제 너는 망했다”라고 말할 만큼 어둡고 힘든 상황일 때도,
믿음의 시선을 발동해서 자신에게 스스로 소망의 언어를 발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는가?
모두가 “저 사람은 실패자야”라고 손가락질할 때, 믿음의 입술을 열어 그를 격려하고, 회복하게 하는 도전을 줄 수 있는가?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선택이 곧 내 삶의 내용을 결정한다.
우리 삶의 매 순간 온전한 선택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능히 취할 수 있노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만나는 하나님> 이제훈
상황은 항상 만만하게 오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넘어뜨려서 다시는 못일어날것 같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주님이 계시다는것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상황 넘어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
마치 농구에서 선수가 손으로는 공(상황)을 다루지만 시선을 골대를 향해 전진하듯 우리 또한 그래야 하는것을 기억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