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title
말씀테마
오늘의테마

 ‘너 이래도 나 믿을 거야?’

그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테스트였다

 2020-08-05 · 
 16524 · 
 551 · 
 1

창세기 16: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믿음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꾀, 요령, 편법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자꾸 딴 길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안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안 믿어지게 하시는 부분도 있다. 주신다고 해놓고 안 주시니까. 아브라함에게도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시고는 자식을 안 주시니 ‘이 길이 아닌가,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좀 다른가, 다른 방법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자연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 주신다고 하셨으면 즉시 주시거나 말씀하셨으면 금방 이루어주시면 되는데, 왜 그렇게 안 믿어질 때까지 그냥 두시는 걸까? 물론 매번 그러시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일종의 테스트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 테스트는 유혹과는 다르다. 유혹으로 다가오는 사탄의 시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시험은 우리에게 안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네가 이래도 날 믿을 거야? 네가 여기까지 믿을 수 있어?’라는 테스트는 종종 하시는 것 같다.

비슷한 예 중 하나가 수로보니게 여인이 아닌가 싶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니 예수님이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신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릇된 선민의식이 담긴 말이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이방인이다. 게다가 이방인은 다 개다.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이셔서 여인에게 “너는 이방인이잖아. 너는 유대인이 아니잖아. 내 능력은 내 자녀인 유대인들에게만 줄 거야. 개에게 주는 것은 마땅치 않아”라고 말씀하셨다. 깜짝 놀랐다. 예수님이 사람을 그렇게 대하시다니, 내가 아는 예수님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일종의 하나님의 테스트였다. ‘너 이래도 나 믿을 거야? 이래도 나 붙잡을 거야?’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시험을 당당히 통과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부스러기만 주셔도 내 딸은 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보라.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 예수님이 이것을 확인하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갈을 통해 대를 이으려고 했다. 하나님이 자녀를 안 주시니 딴 길을 찾아본 것이다. 그런데 사실 꾀, 편법, 요령이 모든 인간사의 원흉이다.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꾀부리는 사람, 편법 쓰는 사람의 결국에 대해 말씀하실 때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 1:4)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쌀이든 겨든 모양은 똑같다. 하지만 겨는 속이 없다. 그것이 편법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믿고 지키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시 1:3) 같아 철을 따라 열매를 맺지만, 편법은 쭉정이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것이 우리가 이제껏 경험하며 살아온 바이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된다. “율법, 곧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복 받고 편법을 쓰면 망한다”라고 할 때, 이것을 구원의 문제까지 연결시키면 성경 해석이 달라진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은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키지 못할뿐더러 실족할 때가 많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족하고 실수하여 고통당하지 않았는가. 자기 의로 자신을 구원한다? 어불성설이다. 우리의 의로 우리의 허물을 가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것이 구원의 도리이다.

그렇다고 ‘율법은 아무것도 아니야.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식이 아니야. 잘못된 거야. 이단이야’라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다. 율법을 누가 만드시고, 누가 지키라고 하셨는가?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 이거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는 것 아니야. 구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그 핏값으로 너희에게 거저 주는 거야. 믿음으로 얻는 거지. 하지만 너희에겐 율법도 있어야 해”라며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을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복되게 잘 살라고 십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말아라”라는 율법이 너무 많으면 못 지키니까 그래도 열 가지는 꼭 지켜보라고 주신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지키면 복이 된다.

하나님은 까다로운 시험으로 우리를 떨어뜨리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복되게 잘 살게 하려고 계명을 주셨다. 어기면 화가 되고 지키면 복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을 얻는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꾀부리고 편법을 쓰다가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가정에 분란이 일어나고 그것이 지금까지 중동 사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지 않은가? 이런 일들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일들이다. 그러니 기도하자. 끝까지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믿고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편법 쓰고 싶은 유혹에서 지켜주시고 딴 길로 가지 않게 해달라고.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지킴으로 복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기도하고 싸우고 훈련하고 연습하는 하루하루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말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야고보서 1장 2~4절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요한일서 5장 4절

† 기도
자꾸만 흔들리는 저의 믿음을 불쌍히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옵소서. 어떤 상황이든 주님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오늘도 주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 은혜가 넘치는 하루되기를 기도하며 결단해보세요.

크리스천 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크리스천굿즈
https://gp.godpeople.com/archives/105300





†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