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라는 찬송가는
‘장소의 근접’이 아니라 ‘관계의 가까움’을 말해준다.
우리는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의식하게 해달라고, 즉 그분의 임재를 더욱 완전히 의식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과 주권 같은 신비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분께 추궁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가장 안전하고 좋은 대응법은 눈을 들어 그분을 보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오,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그분의 전지성(全知性)의 깊고 신비한 영역에 속한다. 이런 것들을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사람은 신학자는 될 수 있겠지만 성도는 되지 못할 것이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왜요ㅠㅠ 왜요 ㅠㅠ 하고만 있었던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너무 빠져 있던 죄를 회개합니다.
제 눈에는 세상이 너무 크게 보였습니다.
당신이 줄곧 여기에 계셨지만 알지 못했나이다.
당신의 함께하시는, 임재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 안과 주위에 계신 당신을 볼 수 있게 눈을 열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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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나님을 갈망하다 _ A.W.토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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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 이렇게 하면 은혜 받더라 하는 것은
# 종교의 영이죠
# 주님께 받은 마음없이, 했던대로 사역하면 안됩니다_다니엘김
# 예배를_기도하며_준비해야 하는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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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사역자 흉내내는것이 아니라
# 그 사역자가 하나님과 가졌던 시간을 나도 가져야해요_윤성철
# 사람을 나에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 예수님께 이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