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혼자인 나는, 어떤 경우에도 혼자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영역을 깊이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진수입니다.
그대는 신앙의 세계를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혹은 아주 좁은 의미에서 신앙의 세계를 경건생활의 루틴routine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말씀, 기도, 큐티, 예배 등등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그렇게 가벼운 의미로 소급될 수 없습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이 거친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살아내고, 표현해내고, 대답할지에 대한 무거운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영역을 도전해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기초가 된다는 것은 보이는 수많은 것들을 뛰어넘는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불가능, 한계, 좌절, 연약함 등등 앞에서도 가볍게 일어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수많은 메커니즘mechanism은 빅 데이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정밀한 수치와 공식과 계산 속에서 예측 가능한 것들로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엄청난 장점과 힘이 있겠지만, 이것은 믿음을 기초로 움직이게 하는, 꿈꾸게 하는, 도전하게 하는 신앙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좌절을 모릅니다. 신앙은 한계를 모릅니다.
그래서, 혼자인 그대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는 신앙으로 무엇을 도전해보았나요? 그대는 신앙으로 무엇을 꿈꾸어보았나요? 신앙으로 무엇을 표현해보았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고 있습니까?
혼자이기에 만날 수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생의 사조 안에서 안줏거리같이 말하는 〈자유로운 인생관〉이 아닙니다. 또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다는 〈다양한 인생관〉도 아닙니다. 또한,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방관적 인생관〉도 아닙니다.
혼자이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추구할 수 있는 인생관은 〈신앙〉 혹은 〈소명적인 인생관〉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초연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강조해보죠! 모든 것에 초연한 삶입니다. 초연하다는 것은, 초라한 것도 아니고, 초월적인 것도 아닙니다. 초연하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에서 자신의 길을 걷는 삶입니다.
화려해 보이는 것들을 좇거나, 안정적인 것들을 좇아서 사는 삶은, 반드시 만족할 수 없는 삶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이유는 더 화려한 것, 더 안정적인 것을 보게 되면 자신의 가치관이 또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연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은 만족을 느끼고 감사합니다. 또한, 그 결과는 언제나 행복함입니다.
혼자로서 그대가 그리스도인으로 단단히 만들어져야 할 삶의 근육은 이런 초연함에 관한 진리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자신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주님의 길을 걷게 됩니다.
지금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느새 꽤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제가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여쭈어보았습니다. “칠십여 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입니까?” 왠지 뻔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그분의 대답이 참 의외였습니다.
“가장 신앙으로 살았던, 그 시절…”입니다.
아직도 그 대답은 저에게 울림이 있습니다. 어떤 회장이 되고, 담임목사님이 되고, 유명세를 탈 때가 아니고, “가장 신앙으로 살았던, 그 시절…”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읽는 그대는 혼자인가요? 아니면 항상 옆에 누군가가 있나요? 뭐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홀로 서는 법을 배우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대가 적절할 나이지만(?) 여전히 혼자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잘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혼자라는 무게감으로 그 어떤 불안함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간을 혼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그대가 혼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혼자로서 그대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입니다.
그 첫걸음은 〈소명〉입니다.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삶의 모양입니다. 분명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성관계, 썸, 연애, 결혼이라는 범주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소명은 위대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 말씀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 시편 147장 11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 빌립보서 1장 6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한일서 3장 3절
† 기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삶 속에서 제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라 저를 부르신 삶의 모양을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은혜로운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적용과 결단
주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고 감사와 은혜로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결단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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