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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가정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면서요? 그런데 저한테는 왜 그러시는데요?

삶이 퍽퍽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려 할때마다 원망과 속상함에 불평은 주님을 향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미 나의 결론을 내려놓고 주님이 이렇게 해주시지 않으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시냐고 주님이 계시냐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양이 목자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이끌 때 안전하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나아가기를 그것이 순종임을 고백합니다. 

아들이 아프고 난 뒤 ‘감사’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메마른 탓에 오로지 내 상처에만 몰두할 뿐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가 내 속에 누룩처럼 번져 나갔다!

‘흐흐, 곧 망한다. 너와 네 집은.’
내 머릿속을 떠도는 그 소리에 내가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알아, 나도. 우리 집이 반쯤 침몰되었다는 거.”
책상에 엎드린 채 나도 모르게 대꾸하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뭐지? 지금 내가 누구한테 말하고 있었던 거지?’ 순간 나는 내 두 손을 양 볼에 대고 세게 두들겼다.
“너 정신 차려야 돼. 이러다 어쩌려고 그래?”라며 성경을 펼쳤다. 생각나는 말씀을 서둘러 찾아, 소리 내 읽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_벧전 5:8,9 새번역

삶, 특별히 고통의 한복판에서는 조금 전처럼 악의 편에 선 존재는 이 고통을 통해 나를 삼키려 말을 걸고, 선하신 하나님은 이 고통 속에서 나를 일으키려고 말을 거신다.
나를 삼키려는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인지 나는 즉시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엎드렸다. 하나님께 이 혼미함을 토해내지 않으면 나부터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나를 살리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지한 것은 전적인 은혜였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시니, 백성아, 언제든지 그만을 의지하고, 그에게 너희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라. _시 62:8 새번역

생각해보면 아들이 아픈 이후, 아들 문제에 골몰하느라 나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깊이 기도해본 적이 없었다. 순간마다 5분씩 10분씩 엎드려도 보았지만 깊이 기도할 육체적, 심리적 체력이 내게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 같다.

돌덩어리 부여잡고 안개 속을 걷는 심정이어서 기도하려고 엎드려도 기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버버 어버버 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뿐이었다. 그렇게 기도가 막힌 지 오래였다. 마음이 한없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결해야 했다.

미친 여자처럼 엉엉 울다가 소리를 내지르다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감은 내 눈앞에 어린 시절부터 그날까지 나 혼자 내동댕이쳐진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어린애가 되어 하나님께 거칠게 분노했다.

주로 ‘두려움’에 관한 말들이었다.
버려진 듯한 삶이 두렵다 못해 무서워서 사라져버리고 싶은 내 마음을, 그러나 어린 자식들 때문에 사라질 수도 없는 내 처지를 항변했다. 녹록지 않은 삶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더니 이젠 아들까지 아프냐고, 어떻게 인생이 그러냐고 하나님께 따졌다.

‘외로움’에 관해서도 토로했다.
“내게는 왜 의지할 것을 아무것도 안 주십니까? 나를 돌봐주는 이가 아무도 없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길로만….
나를 사랑하신다면서요, 사랑한다면서 왜요?”
“하나님은 왜 나를 내버려 두시나요? 나는 완전 사막 한복판, 어쩌면 망망대해 한복판에 버려졌어요. 어떻게 헤쳐나가라고요?”
그러니까 나는 이 모든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 양 하나님 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하나님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고통의 한복판에 서보니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어쩌면 나는 막막하고 끝 모를 현실의 통증 같은 것을 하나님이라는 분께 무작정 토해내고 싶었다. 격동의 시기에 부모 탓으로 돌리며 거칠게 투정이라도 부려보는 사춘기 아이가 딱 나였다.

1시간쯤 그렇게 기도했을까.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나의 삐딱한 기도를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 들어주셨다(고 믿어졌다). 속을 털어놔보면 상대가 내 말을 듣는지 아닌지 알아채지는 것처럼,

그때 나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거친 언사를 경청하신다고 느꼈다. 그걸 ‘믿음’이라 해야 할지 ‘느낌’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내 상처의 독을 1시간 내내 숨 가쁘게 쏟아냈다. 그러더니 어떤 소리가 나를 감쌌다.

“나는 너를 한순간도 내버려 둔 적이 없단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그날처럼, 생각지 못한 시점에 그분의 마음을 보여주는 분이셨다. 솟구치는 원망과 비난의 언어를 쏟아놓던 그때도, 하나님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하니?”라고 책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안다’라는 눈빛으로 다가오시고는, 나를 한순간도 내버려 둔 적이 없는 나의 유일무이한 보호자가 하나님이시라고 알려주셨다.

그 한 말씀은 마치 ‘너한텐 내가 있잖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너와 동행하는데 뭐가 걱정이니?’라는 뜻으로 들렸다. 아, 그렇다면 더는 절망할 이유가 없다. 살아야 하고 살 수 있을 거라 믿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오가며 가슴 벅차게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이라는 찬양을 불렀다. 두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살랑살랑 춤까지 췄다. 누가 보면 저 여자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을 모습이었다.

가족 모두가 휘청대던 그 계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맨 처음 하신 일은 피폐해진 내 마음을 완벽히 풀어주신 일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을 보여주시며 우리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셨다.

그때 나는 모든 문제의 열쇠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인지 그 뒤로 무슨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를 습관처럼 떠올렸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 하실 때 나도 사랑으로 응답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회개했으면 좋겠다 하실 때 회개로 반응하며,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도와주라 하실 때 같은 마음으로 발 벗고 나서는 내가 되고 싶었다.

하늘 저 멀리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 아픔 아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니까. 그러면 됐다. 나를 다 아시고 나의 상황을 다 파악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더는 두려워 떨 이유가 없다. 나는 이제 그분을 의뢰하여 분연히 일어서리라 다짐했다. 여기일까 저기일까 방황하던 내 마음은 그날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마음 안에 완전히 닻을 내렸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_시 40:1-3
<나는 같이 살기로 했다> 한근영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