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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가정

절망적인 현실에 소망이 사라져 갈때...이것만은 잊지 마세요

현실을 바라보면 아무런 소망이 없고 오히려 낙심과 낙담만이 찾아옵니다. 보이는 것은 누구나 믿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없어지거나 그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주님의 약속만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이 약속하셨다면 믿음으로 끝까지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은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게 하는 차원’에서의 믿음이란 것이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_롬 4:19


아내 사라가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인 것을 알고도 아브라함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에 그것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견디게 하는 능력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라는 표현이 바로 절망적인 상황을 뛰어넘는 아브라함의 견고한 믿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현실적으로 보기에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이 그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되게 했다. 우리가 가진 믿음에는 어려운 현실을 견디게 하는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사랑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 말씀이 떠올랐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사랑의 특성들이 죽 열거되는데, 먼저 4절을 보자. 하나님은 사랑이 어떻다고 말씀하시는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_고전 13:4

하나님은 사랑과 관련한 정의 첫 번째로 오래 참는 것을 꼽으신다. 그리고는 이어서 계속 사랑의 특성들이 열거되는데, 7절에 보면 사랑의 특성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_고전 13:7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는 게 다 같은 이야기 아닌가? 하나님이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사랑은 ‘인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오래 참는 것으로 시작하여 참고 견디는 것으로 마무리하신다. 그러니 인내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라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면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상대방에게 마음을 빼앗겨 첫눈에 반했다고, 사랑에 빠졌다고 흥분하다가 며칠 지나면서 마음이 식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있었음을 기억한다.


성경을 읽다 보니 그런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을 사랑이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에 빠졌다’라는 말이 나오려면 적어도 눈물이 날 정도로 견뎌내는 인내가 포함되어야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가정을 십 년 이상 유지해온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가정을 지금까지 유지해온 세월이 다 인내로 만들어진 눈물 아닌가? 자녀교육도 마찬가지다. 어린 자녀들이 성숙한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과정에는 인내로 만들어진 부모의 눈물이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내가 없는 사랑은 가짜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_약 1:2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힘든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났는데, 어떻게 이걸 기쁘게 받을 수 있는가? 이어지는 3,4절을 보면,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주셨는지 알 수 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_약 1:3,4


우리 큰딸이 대입 삼수를 했다. 본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두 번이나 떨어지는 과정이 좀 억울한 면이 있었다. 두 번 다 준비한 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와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난 지금은 그때 그 고생하는 과정이 본인에게 참 유익한 면이 많았다는 고백을 한다.


나는 확신한다. 우리 큰딸이 두 번이나 입시에 실패하여 낙심하는 자리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픔의 과정을 오히려 유익한 과정으로 바꾸어주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큰 고생 없이 자라는 요즘 청소년들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각자 나름대로 힘든 일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힘든 과정이 결코 본인들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


이건 우리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있듯이 괴로움이 끝없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이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어려운 일이 찾아올 때 어떤 자세로 그것을 대하느냐이다. 우리가 겪는 어떤 형태의 고생이나 고난도 내가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보약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고난은 ‘인내’라는 진짜 중요한 믿음의 요소를 만들어내는 재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우리 안에 이 믿음이 작동된다면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날 줄로 믿는다.

<오늘 새롭게 살수있는 이유> 이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