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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순간 그때를 잊고 있었구나!

 2020-0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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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바울이 된 사건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또다시 그 일을 하기 위해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충격을 받고 현장에서 비추인 빛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된다. 곁에 있던 사람들도 동일한 빛을 보았으나 그분의 음성은 들을 수 없었다. 그 빛이 어떤 빛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들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사울은 그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다. 마치 카타콤의 어두운 공간에 아주 작게 비추어진 빛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초대교회 사람들처럼 그 빛을 만났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 행 9:3-9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 행 22:6-9

사도행전 9장에는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22장에는 빛은 보면서도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본문의 기술 사이에 차이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알아듣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함의 표현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10:27)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는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고, 그와 함께 가던 자들과 같은 사람도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음성을 들은 후 부활하신 예수임을 알고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은 사울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울과 같은 자리에서 동일한 음성을 듣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해 믿음 없이 목적지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되는데 그분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나를 볼 수 있었다. , 나도 음성을 들었는데….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순간 그때를 잊고 있었구나.’ 이런 감정이 몰려오면서 한동안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도, 도마처럼 그분을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바울이 된 사울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신다는 말씀이 믿어진다(3:20).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사는 신앙인이 적지 않다.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내 신앙에 결부되어 사명을 감당하고 있느냐라는 질문 앞에 대답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목회자의 책임도 있다. 예수의 부활을 자주 강조하지 않는 익숙함에 젖어있다.

사순절 동안 끊임없이 고난을 묵상할 뿐, 부활에 대한 메시지는 많이 부족하다. 한편으로는 사단이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도 이와 관련된 메시지를 남겼다.

최근에 어느 교수님이 쓰신 글을 보고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유감, 부활절 홀대 40:1’ 이 숫자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순절과 부활절을 비교하는 숫자입니다.

우리는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기리고 묵상합니다. 그러나 부활절에 할애된 시간은 고작 하루에 불과합니다. 이 글을 읽을 때 폭풍 공감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40일씩 묵상하고 금식도 하지만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하루뿐입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이 40:1이 아니라 400:1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한 젊은 유대인의 안타까운 죽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너무나 공감되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17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이렇게 소중한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었던 제자들 모두가 순교했다. 그전에는 다들 도망가고 베드로는 배신까지 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모두가 죽음의 길로 걸어갔다. 만약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부활을 보았기에 확신하게 되었고 순교할 수 있었다.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왜 그들이 순교까지 하면서
믿음을 지켰겠는가?

이를 예수 부활의 정황 증거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제자들의 급진적인 변화에 대하여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예수가 부활할 것을 믿지 않았고 그런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죽었던 예수는 부활했고, 그들은 다시 사신 예수를 직접 보았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교회들이 생겼고, 교회들의 평판은 긍정적이었다.

이와 같은 정황 증거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었다.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말에 목숨을 걸고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칠 사람이 몇이나 있었을까? 예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 말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요한계시록 3장 20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베드로전서 1장 3절

† 기도
하나님, 부활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라간 사울과 같은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만 묵상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소서. 또한 만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내 삶 안에 기뻐하며 누리게 하소서.

적용과 결단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 주신 예수님, 당신도 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은가요?  그 예수님은 당신에게도 찾아오셔서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의 고난만을 묵상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감사함으로 누리며 전하는 당신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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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