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행함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거기의 핵심적 교훈 중 하나가 언어생활입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언어가 바로 온전한 사람의 기준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약 3:2). 여기서 ‘온전한 사람’이란 완전하다기보다는 성숙한 사람이란 뜻에 가깝습니다.
그러면서 언어의 파괴적 기능과 생산적 기능을 함께 언급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 약 3:9,10
언어는 찬송의 도구일 수도 있고, 저주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문 고사 성어인 ‘구화지문, 구복지문’(口禍之門, 口福之門), 즉 ‘입은 화에 이르는 문이기도 하고, 복에 이르는 문이기도 하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혀는 양날의 칼처럼 전혀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을 순례하는 우리는 모두 언어의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순례자 크리스천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서 ‘신실’이라는 친구를 만납니다.
신실은 크리스천에게 여러 가지 간증을 전하며 크리스천의 순례길을 준비시켜주는데, 특별히 ‘수다쟁이’를 만난 경험을 들려줍니다. 수다쟁이는 은혜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척 말로만 꾸미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실은 그 사람으로 인해서 기만당했던 어려움을 고백합니다. 존 버니언은 이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순례에서는 이런 수다쟁이보다 신실한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수다쟁이의 아버지 이름도 재미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달변’입니다. 그들은 말한 바를 실행에 옮기지 못합니다. 크리스천은 이들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잘 말할 줄 아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크리스천과 소망이 허영의 시장에서 나왔을 때 ‘감언이설’이라는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이름은 ‘두 마음’, ‘잔머리’, ‘일구이언’, ‘양다리’, ‘가식여사’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들을 만나 고생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말에 신실함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어의 신실함이 없고 기회주의적 처신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기쁨의 산을 떠날 때 크리스천이 목자들로부터 받은 주의사항에도 언어에 대한 부분이 등장합니다. 목자들은 ‘아첨쟁이’를 유의하라고 말해줍니다. 아첨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결코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존 버니언은 순례의 길에서 언어의 신실함이 없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가르칩니다. 언어는 영성을 측정하는, 영성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비밀을 누설하니 피하여라
- 잠언 20:19 (쉬운성경)
우리에게는 시편 기자의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의미 없는 소리로 가득찬 곳입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이런 세속적인 영성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영성 중 하나가 바로 침묵의 연습, 침묵의 훈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세속의 언어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훈련이 바로 침묵의 훈련인 것입니다.
사라 맥라한(Sara McLaughin)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패스워드는 침묵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려면 침묵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며, 침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침묵이 중요할까요?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 출 14:11-12
이 말씀의 배경 상황은 잘 아시는 대로 홍해 바다 앞에 선 이스라엘이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를 보며 온갖 불평을 쏟아내는 장면입니다. 그때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여기에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며 조용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싶거든, 하나님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침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부름으로 예배 시간에 자주 사용되는 구절인 하박국서 2장 20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 안에 있으니 그 앞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기 위해, 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잠잠함’입니다.
예배로 나아갈 때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도우시는 힘이 필요할 때도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새 힘을 공급받고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너무 떠들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없습니다.
† 말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 고린도전서 4장 20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야고보서 3장 2절
† 기도
하나님, 주님 안에서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상의 의미 없는 말로 가득 채우고 내뱉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언어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훈련하게 하소서. 침묵하게 하소서. 그렇게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격하며 찬양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 적용과 결단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조용히 침묵할 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간증합니다(욥 4:16).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조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침묵을 훈련할 수 있는 적합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보고 훈련해보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