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하나님은 앤드류 머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앤드류 머리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님은 저에게 있어서 항상 첫째이십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같지 않다고 느끼고 이로 인해 하루 종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 대답했는가?’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시 대답했습니다. “예, 하나님은 저에게 있어서 모든 것입니다!” 그때서야 하나님의 마음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첫째가 되신다는 말에 기뻐하지 않으신 걸까요? 처음에는 작은 문제로 여겼던 이 생각이 제게 점점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앤드류 머리의 이야기가 옳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라는 말은 둘째, 셋째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묻기를,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어떤 존재예요?” 했더니 남편이 “당신은 언제나 내게 첫째야!” 한다면 좋을까요? “당신이 첫째고 미스 김은 둘째고 미스 리는 셋째야” 하면 만족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전부이십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 사랑은 안 해도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다음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같은 주제이지만 삶의 주도권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첫째이고 이웃은 둘째이고 나는 셋째라는 생각은 한 가지 문제만 빼면 매우 훌륭한 생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란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히 이론적인 생각입니다. 실제 삶에 부딪히면 이렇게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이웃을 그다음에 사랑하고
그러고 나서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몇 번째이십니까?
† 말씀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 마가복음 12장 33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로마서 14장 8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고린도전서 2장 2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갈라디아서 6장 14절
† 기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심을 날마다 삶으로 고백하는 자녀되기 원합니다.
† 적용과 결단
하나님은 당신에게 전부이십니까?
나에게 전부가 되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가기로 기도하며결단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