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화가 난 성도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음주 운전자로 인한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전도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왜 그런 사고를 막아주지 않으셨느냐며 항의 섞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정의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그 순간, 어찌 가만히 계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성도의 아픔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으며, 그 격한 마음에 무슨 말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런 때, 목사로서의 한계와 부족함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오직 함께 슬퍼하며 주님께서 친히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악을 다 막으실 수 있으십니다. 악한 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시고 악한 자가 불의한 일을 벌이지 못하게 다 막으실 수 있으십니다. 아이가 높은 곳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실수로 불이 나거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불의한 일을 막아주시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라비 재커라이어스는 “만약 하나님께서 온갖 악한 것을 다 막아주신다면 언뜻 아주 좋을 것 같지만 우리가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길도 사라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사랑입니다. 누구나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최고의 가치라는 것은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있으려면 반드시 우리에게 자유로운 의지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임의로 간섭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맡겨주시는 영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악한 일이 일어날 때 마다 간섭하셔서 막아주신다면 너무나 좋을 것 같지만,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대단하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면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이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악한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악하게 살지 않을 때, 그것이 귀한 것이 아니겠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아름답고 소중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일을 다 막아주시지 않으시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사랑만 하도록 만드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악을 지켜보고만 계시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롬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셨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전체 역사를 돌아보면 악한 일 조차 하나님께서 선한 결과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 축소판이 요셉입니다. 그 형들이 요셉에게 큰 악을 저질렀으나 결국 요셉의 말처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창 50:20)
사탄이 까닭 없이 욥을 공격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하였습니다. 욥처럼 불쌍하고 억울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이 겪었던 이해할 수 없는 큰 고난으로 인하여 성경에 한 책이 생겼고 역사상 허다한 무리가 그 책에서 은혜를 받아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은 배신과 고문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로인하여 온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해할 수 없는 악한 일을 겪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오직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 순간이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임을 증명할 때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