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받지 않는 삶의 태도로 인해 벌어진 비극으로 시작되는데,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악한 시대를 살았던 다니엘이 적국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비참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흔들림 없는 견고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다니엘서 1장을 보다 보니, 거기에는 몇 가지 비결이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를 살펴보겠다.
다니엘이 악한 세상을 향해 보였던 대응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잡아온 포로들을 바벨론 문화로 세뇌시키는 것이었다.
이것과 관련하여 바벨론이 취한 정책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유능한 포로들을 잡아와서 바벨론의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둘째는 그들에게 과분한 대우, 즉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는 일종의 유화정책이었다(단 1:4, 5).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과분한 대우 아닌가? 그런데 포로들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 그들의 정책에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들이 행한 세 번째 정책을 보면 그 의도가 드러난다. 바벨론이 시행한 세 번째 포로 정책은 ‘창씨개명’ 즉 이름을 바꾸게 하는 것이었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 단 1:7
왜 이름을 바꾸게 하는가? 그 이름에 담긴 의미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란 뜻인데, 바벨론이 바꾼 그의 이름인 ‘벨드사살’은 ‘벨이여, 나의 생명을 보호하소서’란 뜻이다. 여기서 ‘벨’은 바벨론의 주신(主神)인 ‘마르둑 신’을 말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하나냐’는 ‘여호와가 은혜를 베푸신다’라는 뜻인데 바벨론이 바꾼 이름 ‘사드락’은 ‘아쿠의 명령’이란 뜻으로 ‘아쿠’는 달의 신을 가리킨다고 한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인가?’라는 뜻인데, 바벨론식 이름 ‘메삭’은 ‘누가 아쿠의 신인가?’라는 뜻이다.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라는 뜻인데 ‘아벳느고’는 ‘느고 혹은 느보의 종’이란 뜻으로, ‘느보’는 마르둑 신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바벨론이 바꾸어버린 이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다 바벨론 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의도가 분명하지 않은가? 포로들에게 과분한 고급 학문을 가르쳐주고, 왕의 음식을 먹게 해주면서 노린 그들의 의도는 딱 하나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빼앗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빼앗으려는 바벨론의 정책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아서 두려움을 느낀다. 청년들과 청소년들 입장에서 이 시대의 문화는 외면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스마트폰도 그렇고, 매일 접하게 되는 인터넷과 영화와 각종 영상도 떨치기 어려운 매력이다.
끔찍한 덫이다.
누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떨치기 어려운 매력으로 다가오는 각종 문화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가치관과는 너무나 다른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다. 지금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타고 어린 청소년들을 자극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음란물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 음란물들이 아이들을 유혹하며 소리친다.
“누려라. 다 누려라. 본능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누려라!”
마치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과 같은 젊은이들을 향해 “왕의 음식을 먹고 왕의 포도주를 마셔라! 마음껏 다 누려라! 대신 이름만 바꿔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만 포기해라!”라고 외치는 것처럼.
창세기 3장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창 3:6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가 바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 같지 않은가? 이런 현실이다 보니 신앙교육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을 혼미하게 만드는 세상 문화의 현실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다니엘의 귀함은 이렇게 문화로 세뇌하려는 바벨론의 정책에 대해 단호한 거절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다니엘’이란 이름을 포기하고 ‘벨드사살’로 바꾸라는 환관장의 요구에 대한 다니엘의 단호한 태도를 보라.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머리 속의 환상이 나를 번민하게 한지라 단 7:15
‘나 다니엘에게’ 처음에 나타난 환상 후 … 단 8:1
‘나 다니엘이’ 이 환상을 보고 그 뜻을 알고자 할 때에 … 단 8:15
반복되는 ‘나 다니엘’이라는 표현 속에 그의 단호한 결의가 느껴지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왕의 음식을 거부했다(단 1:8).
포로로 잡혀 온 주제에 왕이 자기가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베풀겠다는데 그것을 거절하다니,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게다가 왕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자기를 더럽히는 짓’으로까지 표현하고 있으니, 무례를 넘어서서 너무나 무엄한 태도 아닌가? 다니엘은 왜 이런 단호한 표현을 썼을까?
어느 자료에서 이에 대해 두 가지로 해석한 것을 보았다. 하나는 그 당시 왕의 음식과 포도주는 먼저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것을 먹으면 자기가 더렵혀진다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니엘이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거절하는 행위 속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최고의 자리에 두겠다는 결단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니엘의 입장에서 왕이 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바벨론 왕을 하나님에 버금가거나 혹은 그 이상의 충성을 바치는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타협이라 생각했기에 이런 선포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바벨론이 포로들에게서 빼앗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었고, 다니엘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다.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바벨론 같은 이 세상에서 위축되어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비굴하게 숨어 있는 모습에서 이제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돌이키기만 하면 언제든 새롭게 시작하도록 도우신다.
다니엘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영적 깊이를 배우자. 우리 내면의 비굴하고, 우울하고, 패배감에 시달리며 늘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단번에 몰아내시는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우리가 다 경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 말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베드로전서 2장 9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에베소서 5장 8절
† 기도
하나님, 이 세상의 문화는 먹음직도 하며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합니다. 그것이 저를 유혹하고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을 혼미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세상의 문화를 하나님 자리에 놓지 않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이 결단에 흔들리지 말며 오직 성령님께서 함께하여 강하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은 ‘누구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교회는 다니는데, 분명 크리스천이라고 말은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상황과 힘 있는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세상 속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를 결단합시다.
낭독으로 만나는 테마
귀로 들어요~ 갓피플 테마. 눈으로만 읽는 것과는 다른 은혜가 뿜뿜. 테마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고 새롭게 나누어지기를 기도하며, 갓피플 직원들이 직접 낭독했습니다. 어설퍼도 마음만은 진실한 낭독러랍니다^^ 같은 은혜가 나누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