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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두려워 해야할 것은 상처가 아니다.

혼자였을때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살았지만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는 지켜야 할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할 수록 힘들고 두려움을 커져만 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두려워 해야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뿐입니다. 주님만을 경외하며 주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올려드릴 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상처받기 싫은 마음’이다.
다른 사람에게 버림받기 싫고 상처받기 싫은 마음에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더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을 ‘타향지향성’이라고 하는데,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 조력자 증후군,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여기에 속한다.
조력자 증후군인 사람은 ‘누군가를 도와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지랖 넓게 행동하다가 상처를 쉽게 받는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다가 관계에 대한 불안이 높아져 새로운 사람과 관계 맺기를 회피하는 관태기(關怠期)가 찾아온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편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기 싫어서 스마트폰으로 피상적인 관계만 한다.

안정적인 직장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도 불안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선택인 경우도 많지만, 부모의 불안에 의해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내게 상담 받던 한 자매는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어 했다.
예쁜 꽃들을 많이 볼 수 있고, 누군가를 축하하는 일에 내 작품이 사용된다면 얼마나 좋은가! 나는 너무 좋은 직업이라고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이 자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2년간 준비했다.
꽃에 관심이 있는 자매가 공무원 시험이 적성에 맞았을까? 창의적인 직업을 원하는 사람이 앉아서 암기만 해야 하는 공부가 맞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자매는 남보다 뒤처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저 공무원 되기 싫어요. 제가 좋아하는 꽃 만지면서 살래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자신 스스로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사랑받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남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타향지향성의 문제는 ‘나 자신’이 없어지므로 행복감이 사라지는 데 있다. 그러니 아무리 남 보기에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속은 늘 허전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직업을 선택하다 보니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낮은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적인 결핍감과 빈곤감만 더 커진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삶이 중요하다 보니 지금(here and now) 누리는 행복감 없이 늘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한다.

또한 남을 신경 쓰다 보니 착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기 쉽다. 합당한 보상 없이도 남을 도와야 마음이 편하다. 겉으로는 선행을 하며 남에게 베풀지만 결국은 내면의 허기짐을 채우고 포장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람들은 실족도 잘한다. 진정으로 변화되기 전의 베드로가 대표적이다.
그에게는 예수께 인정받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었다. 제자들 중에서 1번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발을 닦아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자신의 몸을 다 씻겨달라고 청했다(요 13:1-10 참조).
이런 베드로도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과 성령체험을 하고 난 후에 180도로 바뀌었다.

현대인의 불안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의 영향도 있겠지만 내 안의 두려움이 가장 크다. 그것을 억누르다 보면 사역도 잘하지 못하고, 은사와 재능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존 비비어는 《두려움》에서 “두려움은 영적 권세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잠재운다”라고 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려워서였다. 결국 주인에게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꾸지람을 들었다(마 25:26). 게으른 것은 알겠지만, 왜 악하다고까지 했을까?
영적 권세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잠재운 것이 바로 ‘악한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고 즐기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해보라.
이분법적인 사고에 머물다 보니 더욱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둘 다 좋은 선택일 수 있다. 아니면 제3의 대안이 있을 수도 있다.
<상처받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기> 유은정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