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기에 목사님과 사모님들을 만날 때마다 주님이 만나게 하신다는 믿음과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많았습니다. 목회 현장도, 가정도 개인의 심정도 무너져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세미나 강의가 진행하면서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질그릇 같은 자신만 바라보니 절망하는 것입니다. 보배이신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는 좋은 목사가 되어 보려고 무척 애를 써 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좌절을 겪었습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인내가 능력이요, 순결이 능력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설교하고 가르치면서도 정작 나는 할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 자아는 자존심으로 뭉친 괴물과도 같았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자존심 때문에 사과를 못하고 용서를 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변명하고 합리화시키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참아야지" "용서해야지" "사랑해야지" 하며 수없이 다짐했고 기도했지만, 저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위선자의 고민을 아십니까? 마음에 기쁨과 평안은 없이 말로만 사랑을 외치고 용서를 외치는 무대 위 광대와 같은 목사의 심정을 아십니까?
때로는 자학하기도 했습니다. 금식도 했습니다. 때로는 마귀나 사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곤고함은 떠나질 않았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속일 수가 있었지만 가까이 있는 동역자나 제 아내는 얼마나 실망했겠으며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 사모님은 목사님을 연구 대상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저 자신이 연구대상입니다. 저도 나름대로도 저 자신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답은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미워지고 용서가 안되는데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격이 없으면 강단에서 내려 주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몇 번이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너무나 감격하고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저 자신에 대하여 너무나 낙심하고 좌절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동안 저는“죽여 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기도했습니다.
자아는 죽어지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죽는 것인지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롬 6:11을 읽고 눈이 뜨였습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죽음은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이 임할 때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 삶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 동행 일기’를 쓰면서부터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동행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2009년과 지금을 비교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언젠가 예수동행 일기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 주님과 하루를 살 것을 생각하니 기쁘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기대가 됩니다.” 전에는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한탄했는데,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매일 매일이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 실패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10번 실패하면 주님은 11번 일으키시고, 100번 실패하면 주님은 101번 다시 시작하게 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