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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 살면 무슨 맛이여? : 중생자의 소명 - 김동호 크리스천베이직

사람은 어느 때 가장 행복할까?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사람은 행복하다. 함석헌 선생의 시 중에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다.

만리 길 떠나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후략)

나는 이 시를 1977년에 알게 되었다. 이 시를 본 즉시 나는 캐나다에 있던 내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그 친구가 바로 내게는 그런 친구였기 때문이다. 이 시를 다 타이핑한 후 나는 맨 밑에 이렇게 적어넣었다.

네가 있는 나는 행복이니라.
내가 있는 너도 행복이니라.
너와 내가 있는 이 세상도 행복이니라.

소명과 행복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한 것처럼,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있을 때도 사람은 행복하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른다. 소명이 있을 때에만 사람은 행복하다.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좋아한다.

좇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자기 한 목숨, 십자가에 걸 만한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절대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윤동주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러워하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부러워하고 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옛날에 비하면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좀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일은 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먹고 죽을 일, 즉 자기 한 목숨을 십자가에 걸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죽을 만큼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자기 한 목숨을 십자가에 걸어도 좋을 만한 일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십자가에 걸어도 좋을 일

자기 한 목숨을 십자가에 걸어도 좋을 만한 일은 과연 무엇일까? 단 하나뿐인 귀한 목숨을 걸 만큼 귀하고 소중한 일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선교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프로 중에 미국의 911 대원들(우리나라로 말하면 119 대원들)의 활동상을 그린 다큐멘터리 식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911 대원들이 최선을 다해 위급한 사람들의 생명을 건져내려 애쓰는 모습을 담은 프로그램이었다.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그런 최선의 봉사로 죽을 사람이 살아났을 때,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쁠까,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께 “하나님, 저도 저런 일 한 번만 해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나가는 말로 한 것 같은 기도에도 응답해주셨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매주 화요일에 성경 공부를 했었다. 교회가 컸기 때문에 새벽반과 낮반으로 나누어 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 권사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와서 시간을 좀 내달라고 하셨다. 이유를 물었더니 점심을 한턱내고 싶어서 그러신다고 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냐고 물었더니, 내가자기 딸을 살려주어서 그런다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권사님의 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권사님께 “따님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데 내가 언제 권사님 따님을 살려주었다고 그러시냐?”고 물었다. 권사님은 내게 자초지종을 밝혀주셨다.

권사님 딸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오페라 주연 가수 중의 하나라고 한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미국에 잠깐 다녀오겠다며 간 후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또다시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날부터 권사님 딸은 꼭 15년 동안, 집 밖으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말이 쉬워서 15년이지 15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사님의 남편은 딸의 일로 충격을 받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5년 만에 그 딸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꽉 닫힌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화요 성경 공부 시간에도 나오게 되었는데, 여전히 마음의 문이 닫힌 채였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굳게 닫아걸린 그 딸의 마음의 문을 뚫고 들어가게 되었다. 그 말씀 하나가 그 딸의 마음에 가 닿으면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좁은 틈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말씀이 들어가면서 권사님 딸은 살아나기 시작했다. 끌려 나오던 딸이 따라 나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어머니를 끌고 나오다시피 할 만큼 열심을 내게 되었다.

어느 날 그 권사님 딸은 낮반에 있는 찬양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드디어 어느 날인가 독창곡도 부르게 되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격적인 찬양을 할 수 있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교인들도 깊은 은혜를 받은 찬양이었다. 그러나 그날 찬양으로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권사님이었다. 권사님은 그 찬양을 들으면서 ‘죽었던 내 딸이 다시 살아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에게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영적 119 대원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정말 기뻤다. 당장 죽어도 원이 없겠다 싶을 만큼 기뻤다. 내가 살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죽었던 사람 하나가 살아났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나는 그 순간 911 대원이 되게 해달라는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영적 911 대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적 911 대원,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영적 911 대원은 세상의 911 대원과 비교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911 대원은 육신의 생명만 건지지만 그날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린 생명은 다르다.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었다. 그리고 911 대원은 생명의 질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없다. 그가 불행할지 행복할지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살린 생명은 그냥 육신의 호흡만 살려놓은 생명이 아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사는 생명, 그것도 잠시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그런 생명으로 살려놓은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생명을 십자가에 걸어야 할 일이 선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일,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 그리하여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主)로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 구원을 얻게 하는 일,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여 뜻이 하늘에서 통한 것같이 땅에서도 통하게 하는 일, 그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

예수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의 소명은 선교이다. 그가 목사든 교인이든 상관이 없다. 차이가 없다. 목사의 소명도 선교요, 교인의 소명도 선교이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선교를 위해 쓰여야만 한다. 구원을 얻은 우리의 소명이 바로 선교에 있기 때문이다.

각각 선교지로 부르시다

사람들은 목사를 성직자라고 한다. 그렇다. 목사는 성직자다. 그러나 목사만 성직자는 아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의 직업은 모두 성직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어느 대학교의 교수님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교수님 한 분이 학기 초에 학교 게시판에 자신이 예수 믿는 교수임을 밝히고 자신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할 학생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냈다. 그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20여 명의 학생이 신청했는데 그중 9명이 전혀 교회를 다니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그 학교의 게시판에 그와 같은 광고를 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학생들이 왔을까? 아마도 몇 명쯤 왔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혀 교회를 다녀보지 않은 학생은 거의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선교하기에는 목사보다 교수가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땅끝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다 목사가 된다면 절대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고 만다. 모든 직업을 성직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헌신할 때라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앞에서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를테면 직장은 흩어지는 교회다. 직장은 우리의 선교지이며 모든 직업인은 그 선교지의 선교사이고 목회자이다. 그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설의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적인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누구나 다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목사만 성직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성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전공과 직업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직업과 전공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과 선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가 무슨 직업에 종사한다고 해도 우리는 선교사다.

직업은 단순히 밥을 벌어먹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직업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직업은 소명이다. 직업에는 선교적인 소명이 있다. 그래서 영어로는 ‘calling’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인들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어야만 한다. 물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생활과 직장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을 바르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한다.

가정과 직장이 목회지라는 사실, 우리 각 사람들이 그 목회지에 파송된 목회자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만 한다. 교인들을 훌륭한 선교사로, 목회자로 양육하여 저들의 임지인 가정과 세상으로 파송하는 일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임을 가르쳐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