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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과 Where의 문제 : 종말의 때 - 김동호 크리스천 베이직

나는 아직도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모임이었던 ‘다미선교회’를 기억하고 있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종말이 온다고 교인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그간 언제나 교회를 어지럽혀왔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종말의 때는 하나님만 아신다고 말씀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내내 종말의 때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말에 현혹되는 사람들 또한 계속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몰라도 돼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말의 때를 알려주려고 하지 않으신 걸까? 우리를 무시하셔서 그러신 걸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감추시는 게 아니다. 우리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고 사랑해서 그러신 것이다. 종말의 때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몰라도 되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몰라야 되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다.

만일 종말의 때가 2030년 12월 31일이라고 가정해보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해주고 알려주셨다면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2030년 1월 1일 정도나 돼서 정신을 차리고 종말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종말은 그때부터 준비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좀 더 늦게 준비한대도 상관이 없다. 계산적으로 말한다면 2030년 12월 30일에 회개해도 능히 천당에 가게 될 테니 말이다.

종말의 때를 미리 알게 된다면 그날이 되기 전까지 아무래도 우리는 나태하고 안이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부러 종말의 때를 가르쳐주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종말의 때를 가르쳐주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루하루를 오늘이 마치 종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살아간다면 그날 하루하루가 마치 구원받은 천국생활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열 처녀 비유가 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미리 기름을 준비해서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나머지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신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오는 시간을 미리 알고 있었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오는지 그 시간을 몰랐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혜로운 처녀나 어리석은 처녀 모두 신랑이 오는 시간을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당장 오늘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처녀는 신랑이 마치 지금 당장 올 것처럼 생각했고, 어리석은 처녀는 설마 신랑이 지금 당장 올까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생각하면서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종말과 심판이 어느 때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그 종말과 심판이 마치 오늘인 것처럼 생각하고 조심하면서 산다면 그는 죽어서도 천국에 가겠지만 살아 있는 이 세상에서도 구원받은 자의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과 정신으로 예수 믿는 것을 일러 우리는 ‘종말 신앙’이라고 한다. 하루하루를 그날이 마치 종말인 것처럼 준비하면서 사는 삶은 지혜로운 삶이다. 그것처럼 지혜로운 일은 없다. 매일매일을 종말로 인식하고 지혜로운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듯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면서 살면 죽어서도 천국에 가는 것은 물론 이 세상에서의 하루하루가 마치 천국의 삶인 것처럼 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종말의 때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고 감춰두셨다.

부활 속에는 회복의 능력뿐만 아니라 부흥의 능력이 함께 들어 있다. 부활은 단순한 회복에서 그치지 않는다. 회복만으로도 큰 은혜가 되지만 부활은 그 회복 위에 부흥을 더한다. 회복과 부흥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 원리요, 원칙이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병에 걸려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나를 괴롭혔던 모든 병에서 다 치유되었다. 회복된 것이다.

축구를 하다가 새끼손가락이 부러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제자리를 찾아 붙어서 다시 온전하게 되었다.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져서 스케이트 날에 손바닥을 베인 적도 있었는데, 그 손바닥도 지금은 다 붙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모든 것이 주 안에서 다 회복되고 있다. 사람도, 자연도 모든 것이 다 회복되고 있다.

부흥과 성장도 하나님의 창조원리다. 밀알 하나를 심으면 그것이 30배, 60배, 100배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은 100배도 훨씬 넘는다. 하나님의 원칙과 질서 안에 있으면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이 원칙이다. 시편 1편에도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삶은 열매를 맺고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이 원칙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원칙과 질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실패하고 연약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실패와 연약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본래 하나님의 뜻과 원칙은 부흥과 성장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활의 때에 우리 삶은 단순히 회복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부흥하고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부활이라는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속에 ‘Restoration’(회복)과 ‘Revival’(부흥)이라는 단어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부활은 회복을 의미하며 부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완전하고 아름답게 회복되고, 회복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이 30배, 60배, 100배로 부흥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사람은 목회에 성공하게 될 것이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게 될 것이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직장생활 하는 사람은 직장에서 성공하게 될 것이다. 구원과 부활의 능력은 가정에도 나타나고 세상에도 나타나며, 교회에,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데까지 이르도록, 우리는 믿음의 부유함을 사모해야 한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일하기 위해 힘쓰고, 노력하며 기도해야 한다. 가정생활을 믿음으로 하고, 직장생활을 믿음으로 하고, 교회생활을 믿음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 믿음으로 한 모든 일에 구원과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