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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주는 게 아니라니까 : 종말과 심판 - 김동호 크리스천 베이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은 출발을 알지 못하고 종착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연히 방황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종말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방랑자가 아니다. 저들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분명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역사가 태초에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역사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역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모습으로서의 세상과 역사가 아니다. 인간들이 범죄하여 망쳐놓은 세상과 역사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끝내시고 심판하실 세상과 역사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1-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 21:1-7

종말과 심판을 믿는 믿음

성경은 우리에게 종말의 때는 심판의 때가 될 것임을 말씀한다. 그리고 그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은 언제나 같은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人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예수께서 종말의 때에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매주일 사도신경으로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종말의 때는 심판의 때다. 그날에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역사의 종말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종말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땅에 얽매여 살지 않는다. 땅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도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고 하여 이 세상을 소홀히 여기며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종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반듯하게 살아야 한다.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종말이 있음을 알기에 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는 삶을 살 수 있으며, 심판이 있음을 알기에 땅에 대하여 자유하나 땅에서도 성실하고 반듯하며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탄은 할 수 있는 대로 힘을 다해 종말과 심판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자꾸 잊어버리게 하려고 애쓴다. 종말과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잊어버릴 때, 우리 삶이 온전해지지 못하며 추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심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반듯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종말은 언제나 가깝다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는 감춰두셨기 때문이다. 그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죽음으로 그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서기 1000년에 죽었다고 하자. 그런데 종말은 서기 2000년에 왔다고 한다면 시간적으로 볼 때 그는 죽어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1000년을 기다려야만 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죽음 이전의 시간과 죽음 이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영원한 시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상의 시간은 직선적인 개념의 시간이어서 시작과 끝이 서로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상은 영원한 시간이 흐르는 곳으로, 영원한 시간은 원과 같은 개념의 시간이어서 시작과 끝 사이에 거리가 없다. 시작에 끝이 있고 끝에 시작이 있다. 그것이 바로 원의 개념이다. 원은 시작과 끝이 한 점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시간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시간이다. 그곳은 이 세상에서의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이 한곳에 붙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서기 1000년에 죽은 사람은, 서기 2000년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죽음 이후 1000년을 어디서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 죽는 순간 그는 종말의 자리에 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 죽든지 관계없이 종말의 자리,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종말의 시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면 죽음이 바로 종말이 된다.

예수님은 당시 백성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2000년이 넘도록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은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볼 때 종말은 죽음을 통해 온다. 그리고 그 죽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깝다. 우리에게 언제 종말이 올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우리는 모른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죽음이 곧 종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가까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옳다.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

종말이 있다. 사람에게도 종말이 있고 세상에도 종말이 있다. 죽음을 예상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지혜롭듯이 종말을 알고 종말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가 된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고 살 때 지혜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다. 죽음을 생각지 않고, 죽음을 예비하지 않는 모든 삶은 어리석고 추할 수밖에 없다.

종말이 있고 심판이 있다. 우리는 종말과 심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믿음은 종말에 대한 준비뿐만 아니라 종말 이전의 삶을 반듯하고 아름답게 하는 효과가 있다. 종말과 심판에 대한 신앙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삶을 축복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