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은 삼위일체의 신앙을 ‘사귐의 신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상호간의 협력으로 존재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헬라어로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로 설명합니다. 어려운 말이죠? 그러나 중요하기에 조금 쉽게 표현해보려 합니다.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는 둘레를 의미하는 ‘페리’(περι)와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춘다는 뜻을 지닌 ‘코레시스’(χώρησις)의 합성어입니다. 즉, ‘상호 공재’, ‘상호 침투’가 그 형태의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중요한 존재 방식이며 작동 방식인 것이죠. 그 방식은 서로 사귀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사귐’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귐’이라는 방식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야 하는, 개인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그곳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신앙이 발현되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이런 말들은 어려운 말입니다. 그쵸? 하지만 아무리 어렵다고 해서 버릴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그런 영역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기독교가 그리는 풍경은 참으로 아련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사고하기를 싫어합니다.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검색’은 있어도 ‘사색’이 없는 시대입니다. 선지자의 외침은 거세를 당하고, 영혼의 노래는 외면을 당합니다. 대부분 ‘언뜻’ 모든 것들을 파악하려 하기만 합니다. ‘느낌’만 강조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자극적인 것들, 직관적인 것들뿐입니다.
어느덧 기독교는 고민하고, 사색하고, 괴로워하고, 사유하는 씨름들을 버립니다. 그것이 시대의 행태이고 그것이 그대의 작태입니다. ‘신앙’이라는 세계는, 온 이성과 온 체력과 온 존재를 다해 연구해야 하는 영역인데, 모두 진지함을 싫어합니다. 그것을 낡고 진부한 것이라고 여기죠.
이런 영역에 관해서 11세기 신학자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그리고 그는 역설적이지만, ‘이해하기 위해서 믿음을 추구해야 하는 신앙’credo ut intelligam의 내력도 말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신앙의 참된 요소를 모두 설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과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에 있는 것이죠. 그러나 너무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조국 시대는 이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버렸습니다.
직관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사변적이라는 이유로, 트렌디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버립니다. 그리고 어렵다는 이유로 짓밟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분명 ‘사귐’의 신앙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어렵다고 버릴 이야기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은 ‘사귐’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방식도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사귐을 통해서 모든 것들을 더 알아가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해서, 이 세상에 관하여 대기업 회장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또 술주정뱅이처럼 이 세상을 다루지도 않습니다. 혹은 군인처럼 이 세상을 통제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이 지점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과 ‘호흡’하며, ‘대화’하며, ‘함께’하십니다. 즉,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깊이 있게, ‘사귐’을 나누고 계십니다.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이 인생에게 요구하는 것도 ‘사귐’입니다. 예수님은 그 방향에 대하여 분명하게 신앙을 가지고 있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관한 ‘사귐’이, 온 율법의 요구와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정리하셨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참된 방향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도 그 땅에 계실 때에, 그대에게 보여준 모든 내력은, ‘하나님’과 ‘이웃’에 관한 ‘사귐’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율법의 요구에 응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는 것에만 쓰는 도구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이 땅을 살고 있는 그대에게도 이것에 대해서 아주 무거운 무게감을 요구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그대에게 담백하게 묻습니다.
신앙이 있는 그대는 무엇과 사귀고 있나요? 그리고 무엇부터 사귀어야 할까요?
- 관계, 김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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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마태복음 22장 37-40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명기 6장 5절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장 7절
† 기도
아버지,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과 호흡하며 대화하며 함께하시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 안에서 진정한 사귐과 은혜를 누리고 싶습니다. 함께하여 주세요.
† 적용과 결단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귀며, 교회라는 공동체의 이해를 받고, 힘을 얻고 세상에 나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도 내 삶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귐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