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인생들이 있다. 소위 말하는 ‘먼저 된 자들’이다. 그들은 인력시장에 나오자마자 일감을 얻는다. 건강해 보이는 다부진 체격이 힘도 좀 쓸 것 같고 쉬 지칠 것 같지도 않다.리더십도 있어 보이고, 일에 대한 경험도 많아 능숙할 것 같다. 인력시장에서 좋은 일자리는 죄다 이들 차지다.
그들은 일꾼을 찾으러 나온 이들에게 이른 시간부터 불려간다. 그들은 다른 일꾼들을 쳐다보며 당연하다는 듯 우쭐해한다. 물론 그들에게 남들과는 다른 장점이 있기에 먼저 불려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일찍부터 일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을 불러준 주인의 은혜라기보다 자신이 가진 능력의 결과라고 여기는 교만이다.
먼저 된 자, 즉 이른 아침 인생은 주인의 은혜보다 자신의 능력과 공로에 집착하기 쉽다. 어떤 이들은 주인의 은혜조차 자신의 능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급론이나 공로사상에 빠진 구원론의 착각이다. 주인이 나를 ‘선택했다’는 생각보다 내가 ‘선택받았다’는 생각이 더 강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이른 아침 인생’이라고 여기셨을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큰 축복을 받고, 자신이 행한 공로로 하늘의 상급을 받으며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재물이 많은 청년도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며 구원을 자신의 공로와 연관시켰고,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구원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라며 자신들의 공로를 말했다.
우리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기거나 더 나아가 ‘구원과 영생 외에도 뭘 더 받을 것이 없는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에서도 이런 함정에 빠지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은혜보다 자신의 공로를 앞세운다.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려 한다며 화를 낸다. 하나님의 은혜는 잊혀질지라도 자신의 공로는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집사님 한 분이 교회 온 지 얼마 안 되는 분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이 교회에 와서 마신 포도주가 몇 잔인 줄 알아? 넌 세례 받은 지 2년도 안 되었다며? 그럼 박카스 병으로 한 병도 안 되면서 뭘 안다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성찬식 때 마신 포도주의 양으로 자기를 인정하라고 유세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혼자 생각했다. ‘이 분은 보혈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술만 드셨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까지 할 필요 없다. 내게도 어느 틈엔가 은혜의 추억은 멀어지고 내 수고의 추억만이 생생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나를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래 위에 새겨놓고, 내 공로는 다이아몬드에 박아 넣듯 가슴에 깊게 새겨놓은 것은 아닌지….
† 말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 잠언 16장 18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 누가복음 13장 30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장 23, 24절
† 기도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늘 기억하며 겸손함으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나는 죽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적용과 결단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내 능력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입술을 통해 날마다 고백하기를 결단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