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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은? : 유일한 구주 - 김동호 크리스천 베이직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이 우리 믿음의 고백이다.

베드로가 이와 같은 고백을 한 이후부터 모든 기독교인은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는 유일한 구주(救主)이시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을 이해하는 것이 곧 구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구원(예수)은 임마누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우리에게는 사망으로 역사하게 되어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과 육이 모두 사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런 사망에 처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셨다.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하여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주의 사자(使者)는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예고해주었다. 그러면서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구원자’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라고 해석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언급하는 가운데 마태복음 1장 23절에 이사야서 7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옮겨놓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인용)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18-25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일러준 이름은 ‘예수’인데, 구약에 예언된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이다. 마태는 ‘임마누엘’로 예언된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주의 사자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한 것이 그 예언의 응답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가 ‘예수’와 ‘임마누엘’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의 뜻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구원자’, 즉 구주(救主)라는 뜻이다. ‘임마누엘’의 뜻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마태가 ‘예수’와 ‘임마누엘’을 같은 뜻으로 이해했다고 하는 데서부터 다음과 같은 구원의 정의를 찾아낼 수 있다.

“구원(예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임마누엘).”

‘개아비’와 ‘개자식’의 차이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죽음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구원이 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이 곧 구원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임마누엘’이고 ‘임마누엘’은 ‘예수’이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셨다. 즉, 임마누엘이 되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훗날 십자가를 지시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며 고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와 같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막을 수 없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분명한 것이고 강력하다.

나는 개와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개와 고양이는 거의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우리 집에서 기르는 개의 이름은 곰돌이인데, 우리는 곰돌이를 ‘김곰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를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그 이름 속에 담겨 있다. 그래서 나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개아비’라고 부른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다. 그만큼 개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개자식’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화를 낼 것이다. 그리고 싸우려고 할 것이다. 개가 내 자식이 되는 것은 이해하나 내가 개자식이 되는 것은 용납할 수도, 참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내가 개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 낮아지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것은 내가 개자식이 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해지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못 하는 일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할 수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에 틀림없다. 아멘.

말씀이신 예수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구원받은 삶은 하나님을 자신의 구주(救主)로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받은 삶을 위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통하여,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람이 되게 하사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로 한 것이다. 간접 계시가 아닌 직접 계시의 방법을 사용하시기로 한 것이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요한복음도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다. 성경 66권의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33년 동안의 생(生)과 가르침을 통하여 더 분명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본시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의하여 살펴보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며, 이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의 축복된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다. 말씀이 곧 구원이요 천국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용서의 깊이가 사랑의 깊이

예수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그분의 성육신과 말씀 되심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도 확실한 증거는 십자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사망이 죄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구원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의 회개도 중요하지만, 회개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죄의 문제는 용서를 통해서만 해결된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용서’인데, 용서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형제의 죄를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해주시지 않고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어느 누구도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할 수 없지만, 부모는 자식의 죄를 그만큼, 아니 그 이상도 용서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정말 가능한가 아닌가를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가 얼마만큼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고, 조금 사랑하면 조금밖에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이 사랑하면 많이 용서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사해주기 위하여 십자가를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십자가는 사랑이다.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있을 수 없는 위대하고도 완벽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만일 십자가를 지시는 것보다 자신의 사랑을 더 잘 표현하는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는 대신에 그 일을 하셨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기서 ‘이처럼’은 십자가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요 십자가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다. 세상의 그 어떤 죄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이겨낼 수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넘어설 만큼 큰 죄는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죄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면 다 해결될 수 있다.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지존파 사람들이 사형 집행을 받기 전에 극적으로 회개했다. 그러므로 저들은 틀림없이 다 구원을 얻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와 같이 극악무도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그만큼 크고 위대하다. 사탄도 저들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송사하지 못한다. 사탄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지존파의 그 흉악한 모든 죄를 다 깨끗이 씻어주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존파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고, 과거의 사람들도 그랬고 현재의 사람들도 그렇고, 미래의 모든 사람도 다 그럴 것이다.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 모든 완벽한 속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지에 대하여 생각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말씀 사건과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는 구세주가 되심을 알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해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핵심이다.

예수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누구든지 주(主)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