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병으로 오랫동안 앓아오신 목사님 한 분이 있었다. 그 목사님은 식탁 맞은편에 큰 글자로 “나는 당뇨병 환자다”라고 써놓으셨다고 한다. 자신이 당뇨병 환자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고 음식을 함부로 들어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뇨병 환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당뇨병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뿐만 아니라 당뇨병은 원칙적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조금만 상태가 좋아지면 자신의 당뇨병이 거의 다 치료되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죄는 병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착각에 빠지면 당뇨병은 점점 더 나빠지고 나중에는 정말 관리가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진전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 목사님이 자신의 식탁 앞에 “나는 당뇨병 환자다”라고 써놓은 것은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지 모른다. 결국 그 목사님은 당뇨병을 잘 관리해서 은퇴할 때까지도 자신의 건강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도 우리가 반드시 알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하여 상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상대적인 의(義)에 사로잡혀 자신은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당뇨병 환자가 자신이 당뇨병 환자인 줄을 모른다면 그는 당뇨병 때문에 반드시 큰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죄인이 죄인인 줄을 모른다면 그는 그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윗과 바울과 베드로 같은 사람이다. 저들은 성격과 학식과 지위가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다. 그들 모두가 다 죄에 대하여 아주 민감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도 역시 우리와 똑같이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고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주(主)를 배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훌륭한 사람들도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보며, 성경이 단정적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한 말씀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이었지만 우리와 달리 구별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아주 뛰어나게 민감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윗은 왕의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죄악을 고발하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는 훌륭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자복 후에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기도하는 진실된 모습을 그의 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런 모습을 시편 51편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특별히 시편 6편 6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에서 그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철저히 회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깊은 곳에 던짐으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한 말은 참으로 특별하다. 그냥 “예수님, 참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점심 한번 잘 사겠습니다” 하는 정도로 말하면 자연스러운 것인데, 베드로는 그때 예수님에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민감하다는 말이다. 그는 고기가 많이 잡히는 단순한 사건에서도 예수님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예수님을 ‘선생님’, 즉 ‘랍비’라고 불렀는데, 그 사건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게 되었다. 예수님을 주로 인식한 후 그가 또한 즉시 생각해낸 것은 자신은 감히 그분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예수께 말씀드렸던 것이다.
성경에서만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 것 외에는 특별한 허물과 죄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실 바울만큼 하나님께 헌신하여 순종하는 삶을 산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로마서 7장 24,25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잎새에 떠는 바람, 잎새에 이는 바람
하나님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을 좋아하신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날 주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한 세리였다.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곱하면 플러스가 되고, 마이너스에 플러스를 곱하면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에서 마이너스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자신을 플러스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면 답이 마이너스가 되고, 자신을 마이너스적인 존재라고 인식하면 답이 플러스가 된다.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떠한 재능이나 능력보다도 믿음을 더욱 귀히 여기신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Lord)와 구주(Savior)로 고백하게 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믿음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아는 만큼 예수님이 자신의 주와 구주이심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모르면 예수님이 자신의 주와 구주이신 것도 알 수가 없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둔감하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민감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관대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면이 다르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아주 둔감하다.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쓰신다.
윤동주 시인은 그의 유명한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썼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죄를 짓기 전에 죄에 대하여 마음이 흔들리기만 해도 괴로워했다. 그것을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라고 표현했는데, 그가 사용한 표현이 아주 예리하고 예민하다.
그가 사용한 표현은 ‘잎새에 부는 바람’도 아니었고, ‘잎새에 떠는 바람’도 아니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었다. 잎새에 부는 바람은 누구나 다 그 잎새의 흔들림을 볼 수 있는 바람이다. 잎새에 떠는 바람은 멀리서는 잎새의 흔들림을 볼 수 없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바람이다. 그러나 잎새에 이는 바람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바람이다. 그것은 예민한 감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바람이다. 윤동주는 그와 같은 바람에도 괴로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아마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가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죄에 민감한 사람이 되려면
바울이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품고 그 법을 소원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 25절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윤동주 시인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울 수 있었던 까닭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소원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품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할 수 없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괴로워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품고 살아야 하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소원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법과 빛 아래서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죄에 대하여 둔감한 삶을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삶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세상과 사람에게 두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세상과 사람에게 기준을 두다 보니 상대적으로 자신이 그만하면 괜찮은 존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늘과 하나님의 법을 늘 마음에 품고, 그와 같은 삶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심정이 있어야 한다. 산상수훈에 보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나온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애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이 아닐 수 없다. 애통할 수 있는 복은 의(義)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른 마음,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는 마음과 상관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대하여 늘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늘과 하나님의 법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에 대하여 늘 주리고 목마른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하면 늘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늘 영육 간에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