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6-8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이 어구를 통해서 우리는 ‘율법의 행위’를 의식에 한정시킨 사람들이 그저 괜한 트집을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1절에서 율법의 행위라고 언급한 것을 지금은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채 단순히 행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우리말 성경에서는 3장 20절에 나온 어구를 ‘율법의 행위’라고 번역하고 여기 4장 6절에 나온 단어는 ‘일’이라고 번역해서 서로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서는 전자는 ‘works of the law’라고 하고 후자는 ‘works’라고 해서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 - 역자 주).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은 단순한 이 표현이 모든 행위에 차별 없이 적용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는 그가 펼치는 논증 전체에 걸쳐서 효력을 발휘해야 마땅하다. 오직 의식들에서만 칭의의 능력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행위에서 칭의의 능력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의롭다 하신다는 부정否定의 표현이 담긴 문장이 여기에 덧붙여진다.
이런 표현을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사실은, 바울에게 의는 다름 아닌 죄의 사면赦免이며 이 사면 또한 공들이지 않고 그저 은혜로 얻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사면이라는 말 자체가 가리키는 것처럼 의는 행위가 없는 상태에서 전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빚이 면제된다는 것은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채권자가 전적으로 관용을 베풀어서 자발적으로 그 빚을 말소시킬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배상賠償을 함으로써 우리 죄가 용서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입도 뻥긋 못하게 만들어버리자.
바울은 의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런 사면의 개념을 빌려 자기의 논증을 펼치는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죄가 용서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믿음으로 난 의는 행위와 상관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난 의는 죄의 사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죄의 사면에 어떤 행위가 요구된다면, 그의 논증은 분명 불합리한 것이 될 것이다.
다윗이 말한바 반쪽짜리 사면에 대한 중세 신학 교수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다윗의 이 말로 똑같이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허물이 용서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형벌을 마음에 두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우리의 죄가 가려졌다고, 즉 하나님 보는 데서 제거되었다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 죄가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그 죄들에 대해서 형벌을 요구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이치에 맞는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영광에 빛나는 선언이 고스란히 남게 된다. “값없는 죄의 사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결백하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 값없는 의가 끝나지 않고 지속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시달린 다윗이 입을 열어 이 시편 말씀을 선언했을 때는 분명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언을 했을 당시, 그는 수년 동안 하나님을 경배해온 상태였다.
그러므로 믿음의 큰 진보를 이룬 후에 그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될 때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은총 가운데 받아주시는 것 외에는 우리가 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고 선언한다.
‘믿음에서 난 의는 단지 시작일 뿐이고, 그 후에 신자들은 처음에 아무런 공로 없이 얻은 그 의를 행위로 말미암아 지속적으로 보유하게 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궤변도 이런 식으로 논박할 수 있다.
행위와 다른 복들이 의로 인정되는 경우가 종종 언급되지만, 그것 때문에 바울의 논증이 무효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시편 106편 30절에는 주님의 제사장인 비느하스가 간음한 자와 매춘한 자를 벌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치욕거리를 없앴기 때문에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옳은 행위를 했다는 내용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는 약속에 따르면, 율법의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순종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비느하스가 행한 보복 행위가 어떻게 그에게 의로 인정되었는가?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사람은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에 있는 얼룩과 흠은 심판을 받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정결함으로 가리워진다. 어떤 더러운 것도 묻지 않은 행위만이 의로운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은총을 입지 않고서는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우리 행위가 의롭다고 여겨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믿음에서 난 의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위가 의로 여겨졌다는 이유를 들어서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들의 주장에 대해 나는 논쟁의 여지가 전혀 없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놓는 바이다.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얻지 않는다면, 모든 행위는 불의한 것으로 정죄를 당해야 마땅하다.”
8 주께서 …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복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길을 걷는 사람(시 128:1)과 그분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시 1:2), 그런 사람을 복 있는 자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 명령을 온전히 만족시킬 만큼 완벽하게 그것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사면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고 정결하게 됨으로써 복 있는 자가 되기까지, 이런 종류의 복은 아무 쓸모가 없는 셈이다.
주님의 종들이 율법과 선행에 부지런히 마음을 기울일 때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복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도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난 의는 믿음에서 난 의의 결과이다.
또한 행위에서 생기는 복은 죄 사함의 복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원인은 그 결과에 의해서 무효가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믿음에서 난 의를 행위로 무효가 되게 하려고 애쓰는 자들의 의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편의 이 말씀들을 인용하면 왜 안 되는가? 인간이 믿음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복 있는 자가 되는 것 못지않게 행위로 말미암아서도 그렇게 된다고 성경 말씀이 선언하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뿐만 아니라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그 순서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행위에서 난 의에 관한 것이든 행위의 결과로 오는 복에 관한 것이든, 성경에 나온 어떤 선언도 ‘믿음에서만 난 참된 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리고 이 의가 홀로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듯, 믿음에서 난 의가 먼저 굳건하게 세워져야 거기서부터 행위에서 난 의와 행위의 결과로 인한 복이 나와 자라는 것이다.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롬 4:9,10
9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바울이 할례와 무할례만 언급하기 때문에, 많은 해석자들은 어리석게도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유일한 문제는 율법의 의식들로 말미암은 의를 얻는 것뿐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지금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상대로 논증하고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위선자들이 일반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행위에 대해 자랑하지만, 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기들의 행위를 위장한다는 것을 안다.
유대인들도 율법을 심하게 오용함으로 말미암아 참되고 진정한 의에서 멀어지게 된 자기들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만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행위를 심판 받게 되는 사람들은 누구나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원리가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사면이 모든 행위를 선행하지 않는다면, 이 원리조차 충분하지 않게 된다.
이 모든 행위 중에서 으뜸가는 것이 할례였다. 그것은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할례 이야기도 언급하면서 논증한다. 여기서 할례는 율법에서 난 의의 ‘입문’入門 과정으로 언급되고 있음을 항상 기억하자.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자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할례를 행함으로써 율법을 기특하게 잘 지켰다는 것을 자랑했다. 자기들이 굉장한 탁월함을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낫게 여긴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단 하나의 의식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포함하는 율법의 모든 행위, 즉 마땅히 보상 받아야 할 모든 행위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례가 특별히 언급된 것은 그것이 율법에서 난 의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역逆으로 논증을 펼친다.
만일 아브라함의 의가 ‘죄가 사해지는 것’이라면(그는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이 의를 얻었다면, 죄 사함은 이전의 공로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이 논증이 원인과 결과의 순서에서 나온 것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원인은 항상 결과보다 선행하며,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롬 4:11,12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바울은 할례가 의롭다 함을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유익이 없는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제기될 수도 있는 반론에 대해 미리 선수 친다. 그 근거는 할례가 아주 탁월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할례는 믿음에서 난 의를 인치는 일, 말하자면 그것을 승인하는 일을 한다. 바로 그 할례의 목적에 근거해서, 그는 할례가 이미 무할례시에 얻은 믿음에서 난 의를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의의 원인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할례는 결코 믿음에서 난 의를 손상시키거나 없앨 수 없다. 이것은 성례聖禮의 일반적인 유익에 관한 주목할 만한 구절이다. 바울이 증언하듯이,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마음에 각인시켜주고 은혜를 확증시켜주는 봉인封印이다.
성례만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분의 은혜의 도구가 되도록 계획하셨다. 자신의 영의 비밀스러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성례라는 수단을 통해 택함 받은 자들의 유익을 도모하시는 것이다.
버림 받은 자들에게는 성례가 생명 없는 무익한 상징이지만, 그것이 가진 능력과 속성은 언제든 그대로 유지된다.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성례의 효과가 우리에게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약해지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례라는 거룩한 상징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은혜를 인치실 때 도구로 사용하시는 증거이다’라는 원칙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여기서 특별히 명시明示해야 할 점은 할례의 표가 두 가지 은혜를 상징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 있는 씨를 약속하셨고, 온 세상은 이 씨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라는 약속은 복 있는 씨에 대한 이 약속에 의존해 있었다.
그러므로 할례의 표에는 값없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은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약속된 씨를 기대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삶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요구하셨고 그런 삶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상징으로 보여주셨다.
즉, 인간의 본성 전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육신에서 난 모든 것을 사람에게서 잘라냄으로써 그런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할례의 표로 말미암아 그 육신의 부패함을 영적으로 잘라내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모세도 신명기 10장 16절 말씀에서 이를 언급한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미숙한 갓난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신다. 갓난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그 명령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는 영적 할례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언급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나중에 선지자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에 대한 이 개념을 훨씬 더 명료하게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세례가 그러한 것처럼, 예전에 행해진 할례에도 새 생명과 죄의 용서를 증거하는 두 부분이 존재한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의가 할례보다 선행되었지만, 우리가 이삭과 그 후손들에게서 보듯이 성례가 항상 그런 순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에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한 번 그런 실례를 보여주기 원하셨다.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아브라함의 할례가 어떻게 값없는 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지 주목하라. 할례는 믿음에서 난 의를 인치는 것이다. 이는 믿는 우리에게도 의가 전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그를 반대하는 자들이 제시할 수도 있을 법한 반론에 놀라운 솜씨로 대응한다. 만일 할례의 진리와 의미를 무할례에서 찾아야 한다면,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이방인들보다 낫게 여기며 자랑할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할례의 표를 받아서 그 동일한 의를 확증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분명 그는 자기의 논증이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인치는 데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오늘날 우리에게는 할례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우리는 할례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존재하는 오늘날에는 할례를 행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해결된 문제, 즉 이방인들이 왜 아브라함의 경우와 동일한 방식으로 믿음에서 난 의를 인침 받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한 무익한 논증을 시작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무할례시에’ 믿는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만족하기 때문에 할례로 인침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전치사 ‘디아’(dia, ~로 말미암아)는 이렇게 ‘엔’(en, ~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2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여기서 ‘받을’이라는 단어는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왜냐하면 바울은 외적인 할례만을 받고 그것을 자신 있게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중요한 점, 즉 아브라함의 구원을 보증해주는 유일한 요소인 그의 믿음을 본받는 것을 소홀히 여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믿음과 성례를 구별하는 것 같다. 이는 아무도 할례가 자신을 의롭다 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착각하고 믿음은 제쳐둔 채 할례만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만이 칭의에 필요한 모든 요구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아브라함의 순수한 믿음을 본받는다면 꼭 할례가 필요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다른 어떤 도움 없이 믿음만으로 의를 얻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라면 그가 왜 ‘무할례시에’ 된 믿음을 언급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의 두 원인을 혼동하지 않도록 할례와 믿음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를 구분 짓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교리도 동일한 논증으로 반박할 수 있다. 스콜라 학자들은 칭의의 능력을 신약의 성례에 부여하면서 구약의 성례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할례에는 칭의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바울의 논증이 옳다면, 그 동일한 논증이 우리에게도 효력을 발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세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