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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 예수 : 구원에 이르는 신앙 - 김동호 크리스천 베이직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르며 그분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곳 벳세다를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이 불쌍하여 먹이신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이유는, 그와 같은 분이 왕이 되면 먹고사는 경제생활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과 기대가 잘못된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숨으셨다.

신앙의 궁극적 목적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 문둥병자와 혈루병자, 그리고 앉은뱅이와 귀머거리 등등 모든 병자를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일을 실제로 행하셨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신 후 그 병자에게 “아무에게도 내가 너의 병을 고쳐주었다고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히 말씀하시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자신의 일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와 같은 일들이 자꾸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목적이 왜곡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에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을 보면 신앙적으로 왜곡된 면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그분을 따랐고, 어떤 사람들은 물질적인 안정을 바라고 그분을 따랐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의 말과도 달랐기 때문에 인격적인 감화와 철학적인 교훈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도 했다.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자리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을 따르거나,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정치적인 메시아인 줄로 기대하고 그분을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케 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바로 구원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분명치 않은 사람이 많다.

요즘도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구원보다는 병 고치고 부자 되고 출세하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말씀을 통하여 그저 반듯하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많고,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아 그 직분을 감당하는 재미 때문에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잘못된 자세이다. 물론 예수를 믿어 병도 고칠 수 있고 예수를 믿고 축복 받아 사업도 형통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다. 예수는 구원을 얻기 위해 믿는다.

구원, 관계의 회복

우리는 이미 사망을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죄란 하나님을 자신과 세상의 주(主)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욕심을 따라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사망을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고 정의한다면, 구원은 죄사함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과 하나님나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됨으로써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그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한번 죽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영생(永生)이라고 한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나라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구원에서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나라이다. 그 하나님나라에서 영생한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을 하나님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앞에서 구원을 죄사함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정의한 것과 연결하면, 우리는 나름대로 좀 더 온전한 구원의 정의를 얻을 수 있다. 구원이란 죄사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천국의 복락을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인간은 구원 필연적인 존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난 후 인간은 에덴 밖에서 출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출생지는 필연적으로 ‘에덴동산 안’이 아니라 ‘에덴동산 밖’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출생한다. 출생의 장소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부모가 나를 낳은 곳이 곧 나의 출생지가 된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볼 때 에덴 밖에서 출생했다. 우리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 밖으로 쫓겨나 우리를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덴동산 밖’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우리가 ‘영적인 생명’의 자리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의 자리에서 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운명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다. 그것을 우리는 원죄(原罪)라고 한다.

사람들은 인간이 생명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존재인 줄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죽음에서 출생했다. 우리는 생명을 찾아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다. 먹는 것은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문제이다. 아무리 좋은 구경도 생명이 달려 있는 일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즉 사망의 상태에서 출생했다. 그와 같은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 즉 생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다. 생명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다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를 구하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끊임없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먼저 염려하게 한다. 그와 같은 염려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어버리게 하고 소홀하게 하여 세상의 모든 삶과 일을 다 허사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인간은 누구든 구원의 문제, 즉 생명의 문제를 먼저, 그리고 필연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구원 필연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다른 종교에도 죄사함이 있나

요즘 교회 안에 나돌고 있는 잘못된 신학 사조 중에 종교다원주의라는 것이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꼭 예수만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듯, 그리고 어느 길을 통해서든 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듯, 구원도 꼭 예수라는 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른 종교의 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상당히 합리적이고 포용력 있는 주장으로 느껴진다. 그에 반하여 오직 예수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것은 왠지 비합리적이고 독선적인 태도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서구와 유럽의 많은 교회가 그와 같은 사조에 동조하기 시작했으며, 천주교도 그와 같은 사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하여 확고하고도 분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의 이성과 성경이 충돌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믿고 따라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야 한다. 사도행전 4장 12절의 말씀과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은 해석에 따라 달리 풀이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그 말씀은 단순하고도 명확하다.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앞에서 구원을 ‘죄사함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정의했다. ‘죄사함’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죄사함은 피 흘림이 없이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 흘려주셨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때때로 나의 이성도 종교다원주의가 더 합리적이라고 나에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성경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종교를 믿어도 얼마든지 좋은 사람은 될 수 있다. 불교를 믿어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유교를 믿어도 훌륭하고 반듯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얻는다. 죄사함의 도(道)는 불교에도 없고 다른 어느 종교에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천당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으려고 예수를 믿는다. 예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살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소득이 높아지고 세상도 나름대로 편하고 재밌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등한히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이 세상이 좋아 보여도 하나님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은 온전한 세상이 아니므로 결국은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고, 이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도 우리 각자는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천국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가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눈이 어두워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른다.

천국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꼭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물론 구원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만이 구원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물론 죽어서 천당을 가게 되고 또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천당은 꼭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으면 죽어서 가게 될 천당,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되고, 죽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삶도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이 땅에서 나름대로 잘 살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사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구원은 우스운 것이 아니다. 구원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