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습관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에서 온전히 벗어나려면 지적인 생각과 경건의 기도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적인 노동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성과 속의 대립이 종종 그의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의 평안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귀는 차 안이나 책상 앞, 또는 밭에서 나타나 그리스도인들이 하루의 더 좋은 부분을 이 세상의 일들에 쓰고, 극히 일부분의 시간만 종교적인 임무에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것이다. 우리가 각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이것은 우리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우리를 낙심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적극적인 믿음을 발휘함으로써만 이에 성공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이 그것들을 받으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의 모든 시간에 행하는 모든 일들이 이에 포함된다는 입장을 확고히 고수하며 계속 주장하라. 개인적인 기도 시간에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계속 하나님께 말씀드리라. 그리고 생업에 힘쓸 때에도 생각 속의 기도로 그 시간들을 보충하라. 삶의 모든 일을 제사장의 사역으로 만드는 훌륭한 기술을 연마하자. 하나님이 우리의 단순한 행위들 속에 계심을 믿고, 거기서 그분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자.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오류에는 '장소'에 적용되는 성과 속의 대립도 있다. 신약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마저 여전히 어떤 장소에 내재된 성스러움을 믿는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다. 이 오류는 너무나 넓게 퍼져 있어서 그것과 싸우려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지경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렇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 거주하며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둘러싸여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손에 이끌려 이집트에서 나와 약속의 땅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거룩함의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셨다.
그분은 자신을 구름과 불 가운데 두셨고, 나중에 성막이 지어졌을 때는 지성소 안의 불같은 현상 속에 거하셨다. 하나님은 수많은 특징들로 이스라엘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차이점을 가르쳐주셨다. 그들에게는 거룩한 날, 거룩한 그릇, 거룩한 옷들이 있었고, 여러 종류의 씻음, 제사, 제물들이 있었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라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어떤 사물이나 장소의 거룩함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
여호와의 거룩하심은 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었다.
그 후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중요한 날이 왔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교육은 끝났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지성소의 문이 믿음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
얼마 후 바울이 자유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고기는 깨끗하며, 모든 날은 거룩하고, 모든 장소는 신성하며,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시간과 장소의 신성함, 인류의 교육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던 흐릿한 빛이 영적 예배의 충분한 햇빛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교회가 가지고 있던 이런 예배의 영성이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에 있던 자연적인 율법주의가 예전에 구별했던 것들을 재도입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날과 절기와 시간들을 다시 지키게 되었다. 특정한 장소들이 특별히 거룩한 곳으로 표시되었고, 특정한 날이나 장소, 사람에 차이가 생겼다. 처음에 두 가지였던 성례는 서너 가지로 늘어나더니 로마 가톨릭이 승리하면서 일곱 가지로 정해졌다.
종교개혁가들과 청교도들, 신비주의자들은 우리를 이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오늘날의 보수적인 그룹들은 그 속박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나는 그동안 찬성해온 교훈, 즉 일상생활의 성스러움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설명하려 한다. 이를 위해 그것의 명확한 의미와 대조해서 그것이 의미하지 않는 몇 가지를 지적하겠다.
우선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어떤 행위는 그 중요도 면에서 다른 행위와 확연히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에게는 장막을 짓는 일이 로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둘 다 참된 예배의 행위였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은 정원을 가꾸는 일보다 분명 더 중요하다. 그러나 정원 손질도 영혼을 전도하는 것만큼 거룩한 행위가 될 수 있다.
평신도는 자신의 변변찮은 일을 목회자의 일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부름 받은 사명 안에 거하게 하자. 그러면 그의 일은 사역자의 일만큼 성스러울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일이 성스러운 것인지 세속적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이유이다. 동기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주 하나님을 믿으며 나아갈 때 그의 행동은 이전처럼 평범한 행동이 아닐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선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삶 자체가 제사장의 직무가 될 것이다. 그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삶의 임무들을 수행할 때 이런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 말씀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 잠언 16장 2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골로새서 3장 23,24절
† 기도
하나님,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나누었던 저의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이러한 습관을 깨기 위해 싸우게 하소서. 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상을 감사하며 나아가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이 되시고, 모든 행위를 그분께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십니다. 생업을 위해 종사하는 시간, 공부하는 시간, 개인 기도 시간 등 모두 말입니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분리하는 나의 생각을 주님께서 깨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되도록 나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길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