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많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온 세상과 우리 인간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우리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면서부터 우리에게 심어준 원죄적 본능인데, 그것이 바로 가장 근본적인 불신앙의 뿌리이다. 사탄은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여전히 그와 같은 말로 유혹하고 있다.
누가 우리 삶의 주인인가
북미와 유럽 쪽에는 사탄교라는 종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사탄교에서 사용하는 사탄경(經)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탄경의 제일 첫 부분에 나오는 말이 “네 자신이 네 삶의 주인이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을 향한 사탄의 제일가는 유혹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실패케 하기 위함이다. 사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면 자신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지게 될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라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도 문제가 없으려면, 우리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된다고 해도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 새벽에 나는 바로 그 다리를 운전하여 건넜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 새벽 4시 25분경에 그 다리를 건넜다. 그 다리는 그날 아침 7시경에 무너졌다. 아침 7시경에 무너진 다리는 새벽 4시 25분경에도 매우 위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 위험을 알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찬송을 부르며 태평스럽게 그 다리를 건넜던 것이다.
새벽에 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어머니, 저 갑니다”라는 말로 바꾸었다. 가는 것은 알겠는데, 오는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는 것은 내가 보장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스스로 자신과 세상의 하나님이 되어 제 마음대로 산다면 그 인생이 과연 온전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행기로 여행을 자주 하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비행기 조종을 스스로 해본 일이 없다. 조종실의 문을 두드리며 조종사에게 “내가 자동차 운전을 한평생 했는데, 비행기 조종이나 자동차 운전이나 뭐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피곤하실 터이니 조종간을 내게 맡기고 좀 쉬시지요”라고 이야기해본 일이 한 번도 없다.
만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히 내가 정신적으로 이상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그때 조종사도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겨서 내가 하는 말을 믿고 나에게 조종간을 맡긴다면, 비행기는 어떻게 되겠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100퍼센트 추락할 것이다.
나는 내가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나의 인생 또한 조종할 줄 모른다는 사실도 안다. 이 세상과 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비행기는 조종사가 조종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내 인생은 나를 만든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 조종하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안다.
욥기 38장 이하에 보면 욥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질문들이 나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누가 땅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말의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이 수많은 질문의 유형을 분석하면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유형의 질문은 “너 아느냐?” 하는 질문이고, 둘째 유형의 질문은 “너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욥과 우리에게 깨우쳐주려고 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무능과 무지이다.
이 모든 질문을 다 하신 후에 하나님은 욥기 40장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네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그리고 다 할 수 있다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뜻은 “너는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이니 너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고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럭저럭 살고, 마지못해 산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백 명의 사람들에게 “요즘 어떻게 사시느냐?”고 물었다. 무엇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을까? 아마 첫째는 “그럭저럭 삽니다”일 것이고, 둘째는 “마지못해 삽니다”일 것이고, 셋째는 “죽지 못해 삽니다”일는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소원하고 살지만, 정작 행복한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늘 번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부담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을 고해(苦海)라고까지 한다. 그만큼 삶은 고달프고 부담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삶이 그토록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무능하고 무지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의 삶에는 기쁨이나 평안도 없고, 자유도 없고, 늘 고통과 번민과 부담과 스트레스만이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것이다. 우리를 세상과 자신의 주인이라고 추켜세워주는 척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게 하여 쓰러지고 넘어지게 하려는 계략이 숨어 있다.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으로 세상과 자신의 주(主)를 삼지 않고 스스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면 고달프고 힘들어지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자연도 고생한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다스리기 시작하면 자연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피조물이 탄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인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야만 피조물들도 복을 받고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사실을 로마서 8장 19-2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인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과 세상을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과 세상이 다 고통을 받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을 하고 있다.
사용권과 소유권의 차이
우리가 스스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제 욕심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으로 세상과 자신의 주(主)를 삼고 살면, 즉시 그 무거운 삶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행복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년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희년이 되면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가난을 모면하기 위해 넘겨주었던 땅이 원 주인에게로 돌아갔으며, 가난 때문에 팔려간 종도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년의 법을 정해주시고 그것을 지키게 하신 까닭은 토지에 대한 소유 개념이나 정신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토지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정신이다.
땅의 원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땅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셨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땅을 사용하다가 피치 못하게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파는 일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서 땅을 산다는 것은 그 땅의 사용권을 사는 것이었지 그 땅의 소유권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땅값은 희년이 얼마나 남았는가에 따라 달리 결정되었다.
희년의 정신은 참으로 근사한 정신이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일도 당하고 실패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땅도 팔 수 있고 심지어는 자신을 종으로 팔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와 종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희년까지만 기다리면 모든 것이 다시 원상으로 회복된다는 희망이 있었으며, 내 세대에는 혹 어려워도 내 자식의 대(代)에 가서는 다시 공평한 삶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희년의 정신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믿음이 세상에 희망을 가져다주었고, 그 희망이 삶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 했다. 그러나 희년의 정신을 버리고 사람들이 욕심으로 세상을 소유하려고 할 때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기 시작했고 희망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면서부터 오히려 가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세상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세상과 물질의 소유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힘쓰고 노력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그와 같은 믿음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실수하여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희망과 기회를 줌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희망이 넘치는 평화스러운 세상으로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실 때, 삶과 세상은 희망으로 넘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될 때, 삶과 세상은 무거워지기 시작하고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누구의 능력으로 사는가
사람이 미숙하면 미숙할수록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아톰〉이나 〈마징가 제트〉 같은 만화영화가 나오면 골목에 목에 보자기 하나씩을 묶고 날아다니는(?) 어린아이들이 어김없이 나타났다. 저들은 손을 벌리고 “나는 아톰이다”, “나는 마징가다”를 외치며 골목을 날아다녔다. 아이들이 이와 같은 놀이를 하게 되면 부모들은 아주 조심해야 했다. 특별히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베란다 문단속을 잘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런 아이들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아들만 셋을 주셨다. 그 아이들이 자라날 때 이만기라고 하는 씨름 선수가 아주 유명했다. 이만기 선수가 씨름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난 아이들은 곧잘 나에게 씨름을 하자고 도전(?)하곤 했다. 아이들과 씨름을 하면 물론 아이들이 이겼다. 아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번 기우뚱거리다가 일부러 넘어져주곤 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것을 몰랐다. 아이들은 정말로 자기들이 씨름을 잘해서 아빠를 이긴 줄 알았다. 어떤 아이는 밭다리를 걸어서 이겼다고 했고, 또 어떤 놈은 잡치기를 해서 이겼다고 했다. 바로 이런 것이 미숙한 삶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아주 유명한 말을
세상에 남겼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나는 아톰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자신의 무능과 무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미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몇 번 승리해서 유능해졌기로서니 자신이 전능한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외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미숙한 것이다. 그 미숙함에서 비롯된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나폴레옹은 추락하였고, 그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비참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 바울도 나폴레옹과 비슷해 보이는 말을 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내용은 전혀 다르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믿고 자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자기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랑했지만, 바울은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했다. 나폴레옹은 미숙한 사람이었고 바울은 성숙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
우리는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또 절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과 세상을 막론하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으로 자신과 세상의 주인을 삼아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여 살지 않고 자신이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 제 마음과 욕심대로 사는 데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와 세상의 주인이시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개인적인 주(主)로 영접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무지하고 무능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야만 한다. 구주가 되셔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자신이 세상과 자신의 주인이 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죄된 본능이 있다. 그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준 원죄적인 본능인데,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사탄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게 하여 지치고 쓰러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창조한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의 주인이시다.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악한 것이며, 그것이 곧 모든 죄의 뿌리가 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에게 관리하라고 주신 것이지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을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소유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악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와 같은 악한 일을 계속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세로 주고 타국으로 떠났는데, 포도원을 맡아 경작하던 농부들이 흑심이 생겨서 세를 받으러 보낸 종들을 죽이고 나중에는 그 포도원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다는 비유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사람들을 위하여 포도즙을 짜는 틀까지 새로 준비해주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보다 자기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먼저 생각하는 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포도원 일꾼들은 선을 악으로 갚았다.
이 예수님의 비유를 들으면, 사람들은 세상에 그렇게 악하고 나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흥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악한 일꾼들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하여 그와 같은 비유를 드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 악한 일꾼들은 결국 주인에게 진멸되고, 포도원은 주인에게 제때 세를 잘 낼 사람에게 주어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서운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함부로 주인 노릇 하면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것과 자신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죽고 망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나와 세상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지갑의 주인이 내 삶의 주인
추상적이고 상식적인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신앙은 구체적이어야만 한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예수님도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말씀하셨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내 지갑 속에 들어 있는 돈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온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해드릴 수 있어도, 정작 땅 한 평 값도 안 들어 있는 지갑의 돈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해드리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내 지갑의 주인이 내 삶의 주인이다. 지갑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내 삶의 주인도 하나님이신 것이고, 지갑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을 주(主)라고 고백한다고 하여도 결국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인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내 지갑의 돈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물질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도록 세우신 법과 기준이 있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 제도이다. 모든 소득의 십 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聖別)하여 떼어두라는 것이다.
특전대원들은 반드시 낙하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낙하 훈련을 받기 위하여 처음부터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가장 크게 공포심을 느낀다고 하는 높이 10미터의 점프대를 만들어놓고 거기에서 뛰어내리는 훈련을 한다.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점프대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사람은 비행기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십일조가 바로 그 낙하를 연습하는 점프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물질에 대해 가장 큰 공포심을 유발하는 기준이 십 분의 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온전한 십일조를 훈련하여 몸에 익히게 되면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자신의 온전한 주(主)로 고백하기 위한 훈련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점프대와 같다. 이 훈련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하나님을 주(主)로 고백하고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삶의 아무런 권한도 없는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 사탄은 그렇다고 우리를 속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 12,13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肉情)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主)로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으시고 자녀라 해주신다. 종과 자녀는 비교할 수 없는 상대이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했다. 자녀에게는 권세가 있다. 특권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 것이 다 자기 것이 되는 특권이다. 아이들이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올 때 저들은 친구들에게 “우리 집에 가자”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그 집을 살 때 한 푼도 낸 것이 없지만, 아버지 집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자기 집으로 인식하여 ‘우리 집’이란 표현을 쓴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특권이요 권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主)로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어 하나님의 집이 우리 집이 되는 놀라운 특권을 누린다. 사탄은 하나님으로 주(主)를 삼으면 우리는 종이 되어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긴다고 우리를 꼬드기지만, 사실은 하나님으로 주(主)를 삼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나라의 주인이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을 내 주(主)로 고백할 때만 성경이 약속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수 있다. 사탄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면 우리는 종이 되어 빈털터리가 될 것이라고 속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입으로만 믿으면 망한다
‘과연 지금 나의 삶의 주인은 누구이신가?’를 물어보라. 많은 사람이 자신들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유의해야만 한다.
나의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혹시 나의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가? 입으로만 하나님을 주(主)라 하고 실제로는 나 자신과 세상이 주(主)가 되어 자신의 욕심과 고집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빨리 주인을 바꾸어야만 한다. 전지전능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와 세상의 주(主)를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복된 삶을 살 수 없고, 마지막 날에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아무리 주(主)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일을 한 것과, 하나님을 주(主)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긴 것을 하나님은 명확히 분별하여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