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곽상학의 말과 말씀

[곽상학의 말과 말씀] 캐슬인가? 동행인가?

태생적으로 ‘허구(虛構)의 세계’라는 불명예스런 딱지가 붙어있지만 인생의 눈물과 고단함 속에서 발아(發芽)된 포자(胞子)라는 명분이 있기에 소설과 드라마는 독자와 시청자에게 충분히 열광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아마도 그 배양과정에 묻어있는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의 결이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 뿌리를 둔 스토리 예술은 실제로 있음직한 개연성(蓋然性)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그 파급력은 실로 대단하다.

항간(巷間)에 화제작으로 떠오른 드라마 Jtbc의 ‘SKY캐슬’은 으리으리한 석조주택단지 안에 모여 사는 대한민국 0.1% 상류층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이 드라마의 흥행을 추동(推動)한 견인차는 역시 입시(入試)라는 소재였다.

‘합격자의 포트폴리오’나 ‘무서운 게 없는 입시 코디’가 없이는 그 어떤 합격도 담보할 수 없다고 믿는 건 비단 등장인물뿐이 아니기에, 쏟아지는 시청 반응의 행간에는 ‘우리를 이토록 괴롭히는’ 대한민국 입시에 대한 불신과 원망을 드라마 곳곳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공고(鞏固)한 학벌주의 사회에서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부가 대물림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걸림돌도 용납할 수 없는 일그러진 욕망들을 세상 앞에 폭로(暴露)시켰다. 그럴듯한 가면(假面) 뒤에 숨어서 극도의 잔인성을 격발(擊發)시킨 인간의 추악함을 여과(濾過)없이 전파에 흘려보낸 것이다.

우수에 찬 눈빛과 반항아 이미지로 전 세계 뭇 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배우 제임스 딘은 자신이 주연한 1955년에 개봉한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Cain)을 연상시키는 '카잔'이라는 역할을 자신의 메소드 연기로 승화시켰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서 거주했다.(창4:16) 그리고 그는 아들 에녹을 낳고 성을 쌓는데, 그 성에다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붙이니 이름하여 ‘에녹성’이라 하였다.(창4:17) 아담은 가인을 낳고 가인은 에녹을 낳고 에녹은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다.(창4:18) 가인의 계보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아담의 제 7대손 ‘라멕’이었다.

성경은 라멕을 소개하기를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남편이자, 가축치는 자의 조상인 장남 야발과 수금과 퉁소를 잡는 조상인 차남 유발,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삼남 두발가인, 직업은 없어도 ‘즐거운 인생’이라는 뜻을 가진 장녀 나아마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성을 쌓고 에녹캐슬에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구가하고 있는 가인의 가문을 성경은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아담의 7대손 라멕은 3남 1녀를 나름대로 특기적성을 잘 고려하여 진로 지도와 행복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라멕과 그의 두 아내는 그렇게 에녹 캐슬에서 네 자녀들과 함께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성경은 라멕의 인성(人性)을 적나라하게 폭로시키고 있다. 그는 두 아내들에게 부르는 노래를 통하여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자랑까지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을 죽여 버렸고 자신의 몸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차없이 소년을 죽였으며 심지어 자신의 조상인 가인에게 벌을 내린 하나님한테까지 공개적으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창4:23~24)

아담은 셋째 아들의 이름을 ‘셋(seth)'이라 하였다.(창4:25) 셋도 장성해서 에노스를 낳았는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4:26)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절망의 계보가 바로 셋의 가문을 통해 다시 회복된 것이다. 셋의 계보는 창세기 5장에 자세히 설명된다.

아담은 셋을 낳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고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고 야렛은 에녹을 낳았더라. 셋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담의 제7대손 에녹은 공교롭게도 가인의 가문이 살고 있었던 에녹 캐슬의 이름과 동명이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셋의 후손 에녹은 어떤 사람인가?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옛 선지자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올라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얼마나 위대한 고백이며 다짐인가. 찬송가 430장에 소개된 에녹은 일평생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길을 같이 걸었던 동행의 아이콘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천국에 들려 올라간 에녹의 365년 인생은 하나님이 온전히 카운트하신 인정받는 삶이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나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11:5)

하나님과 동행한 위대한 에녹의 믿음은 증손자 노아에게까지 상속되어 믿음으로 준비한 방주 덕분에 전 지구적으로 임한 대홍수 심판에서 셋의 가문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에녹 캐슬 안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갈구하던 모든 가인의 후예들은 물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가인의 가문과 셋의 가문에 똑같이 들어있는 이 에녹이라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에녹의 캐슬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을 것인가? 에녹의 동행을 교훈(敎訓) 삼을 것인가?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어머님!” 드라마 SKY캐슬에서 가장 유행한 입시코디네이터 김주영 선생의 대사이다. 승자독식 구조의 치열한 입시 경쟁(競爭) 구조 속에서 한 입시코디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전적인 믿음이었다.

등급으로 표현되는 피 말리는 상대 평가 체제 속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한다는 것(엡6:12)을 안다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고백한 것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달려갈 길을(딤후4:7) ‘경쟁’이 아닌 ‘경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두 도성(캐슬)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랑에 근거를 둔다고 했다. “지상의 도성은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기를 사랑하는데 근거하고, 천상의 도성은 자기를 경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근거한다. 전자는 자기 자신 속에서 영광을 구하나, 후자는 양심의 증인이신 하나님에게서 그의 가장 높은 영광을 구한다.” <성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14권 28장>

SKY캐슬에서 차민혁 교수가 자녀들의 성공을 위하여 거실 중앙에 배치해 놓은 피라미드는 매우 상징적인 장치이다. 피라미드 꼭짓점을 목표로 자녀를 닦달하는 그 인물을 통해 피라미같이 하찮은 인생(small fry)이 피라미드(pyramid) 꼭대기를 정복하려 하는 것이 '바벨탑'(Babel塔)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인생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성공의 캐슬에 갇혀 저주의 바벨탑을 쌓으며 갈 것인가? 아니면 하찮은 나의 발걸음에 기꺼이 발맞춰주시는 하나님의 보폭(步幅)을 감사하며 동행할 것인가?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선택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선택한 모세의 인생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여호수아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고 결단한 것은 어쩌면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허가된 교사라는 사실이 입증된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children see. children 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