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7,28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그는 충분히 결정적인 이유를 들어 사람들에게서 행위에 대한 확신을 없애버린 다음, 이제 그들의 허영을 질책한다. 그는 여기서 이런 식으로 절규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교만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성령께서 맹렬한 기세로 그 교만을 비난하지 않으신다면, 이 주제에 대해서 그가 교훈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랑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서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공로가 자랑할 거리라면, 그것을 ‘적절한 공로’(congruous merit)라고 부르든 ‘당연한 공로’(condign merit)라고 부르든 (사람들은 공로를 쌓음으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둘 다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바울은 지금 공로를 줄이거나 적당하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공로를 조금이라도 남겨놓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믿음이 행위에 대한 자랑을 제거해버린다면,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돌림으로써 인간에게서 모든 칭찬을 박탈하지 않고서는 믿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면, 의를 얻는 데 어떤 행위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앞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의 공로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가?
만일 율법이 우리 모두를 죽음에 넘겨준다면, 우리가 율법에서 무슨 자랑을 얻겠는가? 오히려 율법은 우리에게서 모든 자랑을 앗아가고 우리를 수치로 뒤덮어버리지 않는가? 그래서 그는 우리 모두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율법의 심판에 의해 드러나게 되었다고 밝힌 것이다.
한편 그가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의가 행위의 율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소유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며,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부족함에 대한 겸허한 고백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 사이의 이 대조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행위는 어떤 특정한 수식어가 붙지 않은 채 보편적인 것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의식을 준수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 행위를 특별하게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행위로 인한 공로를 전부 포함하고 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여기서 ‘법’law이라는 단어를 믿음이라는 말에 적용한 것은 엄격히 말해서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단어 때문에 바울 사도가 전하려는 뜻이 조금이라도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지배를 받게 될 때 행위에 대한 모든 자랑은 쓸모가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율법에서는 행위에서 나오는 의를 칭찬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의는 그 나름의 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법은 어떤 종류의 행위에도 의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바울은 자기의 주된 주장을 이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진술하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행위가 명백하게 배제될 때,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좀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행위의 공로에 관련시키려고 많은 애를 쓴다. 참으로 그들은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으로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말로는 칭의의 능력이 믿음에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랑에 칭의의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은 칭의가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확언함으로써, 그 어떤 행위의 공로도 칭의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한다.
나는 그가 왜 행위를 율법의 행위라고 부르는지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를 의식儀式을 지키는 것에 한정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상태에서 행해진 율법 조문의 행위들을 율법의 행위라고 보는 것 또한 잘못된 해석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가 덧붙인 ‘율법’이라는 단어는 ‘공로가 인정됨’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라는 말에서 율법이 가리키는 것은 율법에 약속된 보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야고보가 말할 때, 그것은 앞의 견해와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두 견해를 모순되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야고보가 사용한 논증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다. 야보고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혼자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입증하느냐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들이 믿음을 가졌노라며 무익한 자랑을 하는 위선자들을 논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을 바울의 경우와 다르게 사용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비논리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단어 또한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다의성多義性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야고보는 사람이 행위로 자기의 의를 입증하지 않는다면 거짓 믿음 혹은 죽은 믿음으로는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나의 《기독교 강요》를 참고하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29,30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그가 제시하는 두 번째 주장은, 이 의가 이방인에게 속한 것이 아닌 것처럼 유대인에게 속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온 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자유 통행로 같은 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창조주이시냐의 여부를 엄밀하게 따져 묻지 않는다. 이것은 확실하게 인정된 사실이다. 그가 던지고 있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구주救主로도 선언하실 것이냐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평등하게 만드셨고 그들을 동일한 조건 가운데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수준에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분의 자비하심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원은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의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에는 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 상호 관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30:22). 하나님께서 잠시 그분 자신을 위하여 특정 민족을 택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창조 원리가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그 원리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으며 세상에 사는 동안 영원에 대한 복된 소망을 품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 의롭다 하실 그는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by, 그리고 다른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through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한다(우리말 성경에는 두 경우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칼빈 역에는 이런 식으로 다르게 되어 있다 - 역자 주). 자기들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어리석음을 지나가면서 간단하게 언급하기 위하여, 그는 동일한 진리를 가리키는 데 다양한 표현의 사용을 즐겨한 것 같다.
그러나 칭의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일말의 차이도 없다. 인간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이 은혜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면, 그리고 믿음이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서 같은 것이라면, 너무도 비슷한 상황에서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미암아’와 ‘통하여’라는 단어들이 풍자적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만일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구별을 짓기 원하는 자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해보자. 즉, 유대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이방인은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식으로 구별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즉, 유대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양자권養子權을 물려받으면서 은혜의 상속자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반면 이방인은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는다. 왜냐하면 그들에 대한 언약이 외부로부터 주어지기 때문이다.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31 그런즉 우리가 … 율법을 파기하느냐 율법과 믿음을 대비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즉시 둘 사이에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요소가 존재하는 것으로 의심한다. 그 둘이 서로 반대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의심한다.
이런 오해는 율법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과 약속의 말씀을 무시한 채 율법에서 행위의 의만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특별히 만연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까지도 심하게 공격했다. 마치 그분이 율법의 폐기를 겨냥해서 말씀을 전하시기라도 한 것과 같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항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주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의식법儀式法뿐만 아니라 도덕법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복음이 모세의 의식들을 폐하고 있어서, 복음의 의도가 모세의 사역을 멸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행위에서 나오는 모든 의를 제거하기에, 복음은 율법의 모든 증거들을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이 의와 구원의 방도를 율법에 정해놓으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이 구절에 나타난 바울의 변호가 의식법이나 도덕적 교훈이라고 불리는 것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에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도덕법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참으로 확증되고 입증된다. 이는 인간에게 그들의 부정함을 가르치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 도덕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율법이 완전해지지 않는다. 율법이 옳은 것을 선포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율법은 과도한 욕망을 강화시키는 것밖에 할 수 없으며,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더 심한 정죄를 당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첫째로 우리는 그분에게서 율법의 완전한 의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의는 우리에게 전가轉嫁됨으로써 또한 우리의 의가 된다. 둘째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성화聖化를 보게 된다. 그 성화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은 율법을 지킬 준비를 갖춘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삼고 나아간다.
의식들의 경우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증을 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 의식들은 중단되고 사라지지만 그분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확증된다. 의식들은 본래 실체가 없는 그림자 같은 형상이다. 의식들을 그 목적과 관련시킬 때, 즉 그것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제정되었는지 고려할 때만 우리는 그것들이 실체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목적을 이루었을 때, 그때 그것들은 가장 잘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르치는 방식을 통해 율법이 확증되도록 그렇게 복음을 전해야 함을 기억하자.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토대가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