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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만 바라보면 된단다...

연애를 할땐 상대방의 허물이나 단점은 잘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고 그사람만 보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니 내 뜻과 방법대로 맞춰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나의 것을 주장하려하기보다 가장 무능력해질 때 상대방의 연약함이나 반응에 상관 없이 매일 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내가 높아지고 강해지는것이 아닌 더 연약해지고 무능력해져서 주님이 일하시는 가정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결혼하고 1년간 사랑하기를 연습하고 순종했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사랑을 배웠다.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던 데 대한 답을 얻은 것만 같았다.

흔히 ‘전심을 다해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상대는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의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애써 채워보려 하지만 채울 수 없는 허기를 과연 누가 채울 수 있을까? 영원히 사는 법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영원히 사랑하는 법도 주님께 답이 있었다.

영원히 사랑하는 법은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 그분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에 순종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의 연약함이나 반응과 상관없이 매일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을 연습하는 동안 나는 내가 해오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사랑을 배웠지만 대신 무능력해졌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시기에 주님은 자연스럽게 내게 신학을 배우게 하셨다. 내가 알아야 할 기초와 같다는 주님이 주신 감동에 나는 순종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흘러 강도사 고시를 다 치르고, 목사 고시와 안수만을 남겨두었다. 그런데 마지막 관련 서류에 도장을 받으러 가는 차 안에서 주님은 내게 ‘멈춰 기다리라’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때부터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주님, 최종적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지만 주님은 침묵하셨고, 마음이 조급해져 갔다.

어느 쪽으로든 결정 나길 바랐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감사함으로 이 길을 걷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련 없이 다른 길을 걷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며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주님의 침묵 앞에 조급해하지 않겠습니다. 사울 왕처럼 앞서지 않겠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얻지 못하면 다음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아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군사를 일으켰다. 결국 사울 왕의 선택은 적중했고, 이스라엘은 승리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다.

이 슬픈 그림을 보며 나는 기도했다.
‘극단적이지만 블레셋에 패배하더라도 하나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더라도 막막해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침묵하셔도 조급해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오늘 내게 하시는 말씀 앞에 순종하겠습니다. 만일 탑을 쌓다가 마지막 블록 하나를 올려 완성하기 직전이라 해도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면 다 허물어버리겠습니다. 주님이 다시 탑을 올리라고 말씀하시면 그때부터 감사함으로 가장 밑바닥 하나부터 다시 쌓아 올리겠습니다.’

그제야 내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몇 년 동안의 과정을 허무는 게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이제 임박했다고, 마지막이니 어서 말씀하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면 거기에 반응하겠습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궁금할 때, 수많은 문제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려 할 때 내가 사용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를 보다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얽힌 문제 속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려 들면 좀처럼 해법을 찾기가 힘들다. 문제 속에서 내 기득권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지, 대가 지불을 할지, 후폭풍을 감당할지를 다 제외하면 생각보다 문제는 단순해진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찾은 이후에 순종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무리 풀어내도 여전히 묶여있거나 이도저도 알 수 없을 때는 내가 불리하거나 불편한 쪽을 선택하면 많은 경우에 적절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잘못했다”(민 14:40, 새번역).
대단한 믿음의 고백처럼 들리지만 그곳에 올라간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과연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가나안 땅을 믿음으로 취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받았다. 그 땅을 악평한 자는 죽었고, 나머지는 40년간 자신들의 죄의 짐을 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퍼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약속의 땅을 차지하자며 산꼭대기에 올랐다.
“우리가 잘못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으로 올라가자.”
얼마나 믿음과 용기 있는 행동인가? 하지만 모세는 그들을 말리며 말했다.
“어째서 너희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느냐?”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않았기에 심판받았으니 그와 반대로 행동하면 기뻐하시겠지’라는 등식은 하나님을 단순 기계로 여겼기에 나온 것이다.

엘리 시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다(삼상 4:3,4). 법궤가 있기에 승리할 거라 믿었던 그들은 이전보다 더 큰 패배를 맛보았다. 자신들의 승리라는 목적에 하나님을 기계적으로 끌어다 사용한 결과였다.
산꼭대기에서 살육당하는 장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장면을 상상하면 너무도 끔찍하다. 자신들은 믿음대로 싸웠는데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두렵다. 모세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올라가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당신들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적에게 패합니다… 당신들은 칼을 맞고 쓰러집니다. 당신들이 주님을 등지고 돌아섰으니, 주님께서 당신들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민 14:42,43, 새번역).

이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마음, 혹은 확신이나 계산으로 우리 인생의 지난한 싸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40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가나안과 전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옹성과 같던 여리고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유와 상대적으로 싸우기 수월했던 아이성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유도 이와 닮아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싸움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좀 더 확신에 찬 상태로, 긍정적인 마음으로 싸우라고 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살아간다.

늘 나와 함께 살자.
오늘 나와 함께 걷자. 오늘처럼 내일을 걸으면 된단다.
사람들은 그런 너를 보고 혀를 차겠지만 너는 나만 바라보면 된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야, 내게로 오렴.
<오늘 믿음으로 산다는것>이요셉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