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18-23
18 하나님의 진노가 …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의義가 오직 복음으로 말미암아서 주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제 바울은 의와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것들을 진술함으로써 논증을 펴나간다. 그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없이는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복음에서만 찾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 증거는, 이 세상의 구조와 그 구성 요소들이 아주 아름답게 질서 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마땅하지만 그 본분을 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신성모독의 죄뿐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비열하고도 사악한 죄를 짓고 있다는 증거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주요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가 회개를 촉구할 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바울이 여기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며, 중심이 되는 주제는 앞 절(17절)에 명시된 것 같다. 그의 목표는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는 이미 선언했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의 은혜에만 구원의 찬양을 돌릴 정도로 기꺼이 스스로를 낮추려 하지 않을 것이기에, 바울은 온 세상이 영원한 사망에 처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이므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생명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 나온 각 단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해석자들은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를 서로 구별하면서, 전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더럽히는 것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에게 정의가 없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불의를 바로 이어서 참 종교를 무시하는 것과 연결시키므로, 두 단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좋겠다.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은 환치법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의 경건하지 않음’ 혹은 ‘모든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경건하지 않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두 표현이 나타내는 바는 한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죄를 짓기 때문이다.
‘아세베이아’(asebeia, 불경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암시하는 반면 ‘아디키아’(adikia, 불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하나님에게서 그분께 합당한 영예를 부당하게 탈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노’라는 말은 성경에서 보통 하는 것처럼 인간의 용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가리킨 표현으로, 하나님의 보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때는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노’라는 말은 하나님 편에서의 어떤 정서를 내포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벌을 받는 죄인 편에서 느끼는 감정을 가리킬 뿐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로부터’라는 표현을 형용사로 이해해서, 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사람이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아무런 구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온 세상에 쏟아부어져서 하늘에까지 가득 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것 같다.
하나님의 ‘진리’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의미한다. 진리를 ‘막는다’는 말은 그것을 감추거나 덮어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은 절도죄로 고소당하게 된다. ‘불의로’라는 말은 히브리어 관용구로서 ‘부당하게’injuste라는 의미이다. ‘부당하게’라는 표현을 쓰면 그 의미가 명료해진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바울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되는지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 또는 같은 이야기지만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만들고 자극을 주는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크신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증거를 우리의 제한된 역량(ad modulum nostrum attemperat)에 맞게 조절해서 선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해하는 면에서 어떤 한계가 있으며 우리는 그 한계 내에서 그분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직 어리석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본질을 알고자 애쓴다.
완전한 지혜를 갖춘 교사이신 성령님께서 ‘토 그노스톤’(to gnostone, 알 만한 것)에 우리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만한지 바로 이어서 설명할 것이다. 이 구절은 ‘속에’in라는 전치사[단순히 ‘저희’(ipsis)가 아니라 ‘저희 속에’(in ipsis)] 때문에 그 의미가 더 강조된다.
바울 사도가 자주 사용하는 히브리 관용구에서는 불변화사 벳(beth, 영어의 in에 해당함)이 종종 불필요한 여분의 요소이지만, 여기서는 그가 하나님의 속성의 현현을 가리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쓴 것처럼 보인다. 그분의 속성은 너무나 강력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도무지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그분의 속성이 새겨져 있다고 분명하게 느끼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이셨다’고 할 때, 그는 인간이 이 피조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또한 인간에게 눈이 주어진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이 세상의 모습을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지으신 그분께로 이끌리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 분명히 보여 하나님은 원래 우리가 볼 수 없는 분이다. 그러나 그분의 위엄은 그분이 하신 모든 일과 그분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서 빛을 발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것들 속에서 그분을 인정했어야 한다. 그것들은 자기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이 세상을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혹은 반영(specula seu spectacula)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히 11:3).
그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속성들을 자세히 기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알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만물을 지으신 그분은 시작도 없으신 분이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러한 발견을 하게 되면, 이제 그분의 신성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성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더불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의 모든 속성이 신성이라는 이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주는 이 증거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얻게 되는지 분명하게 입증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고소당하는 것을 막을 만한 그 어떤 변명도 도무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두 가지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들 사이에 자신의 영광을 알리기 위해서 스스로를 드러내실 때, 그 빛 자체는 충분히 밝고 환하다. 그러나 우리가 눈멀었기 때문에 그 빛이 충분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해서 그런 것이니 우리의 사악함을 정죄하지 말아달라고 탄원할 만큼 그 정도로 우리의 눈이 먼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신성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되고, 그분이 어떤 속성을 가졌든 간에 그분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판단은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고 참 지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빛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즉, 우리는 눈먼 까닭에 목표한 바에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핑계할 수 없을 만큼은 충분히 본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진리를 사도행전 14장 17절에서 아주 잘 설명한다.
그는 지나간 세대에는 주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무지 가운데 있도록 방임하셨으나 그렇다고 자신을 전혀 증거하지(아마르튀로이, amartyroi)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고 결실기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핑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만 도움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은 구원을 주는 지식과는 크게 다르다. 구원을 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의해 언급되었고(요 17:3), 예레미야는 그 지식을 자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렘 9:24).
21 하나님을 알되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 대한 지식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넣어주셨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심으로써 인간이 자발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 사실, 즉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은 우연히 존재하지 않으며 자체적으로 생겨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인지 항상 주목해야 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하나님의 영원성과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과 진실하심과 의와 자비하심을 포함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분이 만물을 만드신 분이라는 사실에서 그분의 영원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분이 만물을 그 손 안에 붙들고 계시고 그것들이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능력이 나타나고, 만물을 완전한 질서 가운데 두신다는 사실에서 그분의 지혜가 나타난다.
그분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 그리고 그분으로 하여금 만물을 보존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선하심 자체로밖에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분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을 볼 때 그분의 정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분은 죄를 범한 자들을 벌하시고 무죄한 자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악함을 그토록 인내하시며 참아내신 것을 보면 그분의 자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므로 거기에서 그분의 진실하심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그분의 영원성과 지혜와 선하심과 정의로우심에 합당한 찬양을 그분께 올려드려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속성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이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분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들이 불경스럽게도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강탈했다고 하는 것은 백번 옳은 소리이다.
바울이 ‘감사하지도 아니하고’라는 말을 덧붙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에 빚지지 않은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를 기뻐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분께 엄청난 빚을 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이성이라는 허망한 것으로 향했다.
그 이성이라는 것은 전혀 분별력이 없고 덧없는 것이다. 그렇게 어두워진 마음은 아무것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모든 방면에서 무분별하게 허둥대다가 오류와 거짓에 휩쓸리게 되었다. 참 지식의 씨앗이 자라서 성숙해지기 전에 그들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질식된 것, 이것이 그들의 불의不義이다.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사람들이 이 구절에서 일반적으로 추론하는 내용은, 바울이 여기서 지혜에 대한 명성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특별히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구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바는, 위대한 사람들의 탁월함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때,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칭송 받을 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해석자들은 아주 빈약한 추론 과정을 거쳐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왜냐하면 특별히 철학자들만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다 공통적으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어떤 개념을 형성하려고 시도했고, 그분을 그들의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주제넘은 태도가 철학 학파에서 배운 것이 아니고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있는, 말하자면 모태母胎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악이 모든 세대에 창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미신적 관행을 고안해내게 했음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정죄하고 있는 오만함은, 인간이 겸허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때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지혜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자기들의 낮은 처지와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린 것을 말한다. 바울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멀리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라는 이 원칙을 고수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은 거만하게 자기들 스스로를 높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보복으로 말미암아 어리석게 되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앞의 해석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또 하나의 명백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오류(de affingenda Deo imagine)가 철학자들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 인정하고 승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 바꾸었느니라 인간은 자기들의 육적인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참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대신 새로운 거짓 신,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환영幻影을 만들어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이를 다른 아이와 바꿔치기하는 방식처럼 그들은 참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믿었고 그 나무 우상을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형상으로(pro simulacro) 생각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히 그분의 형상을 만들 정도로 그분의 위엄에 대한 저속한 생각을 해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이든 정치가든 철학자든 그 누구도 그런 뻔뻔하고 참람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 가장 사려 깊은 분별력을 가진 플라톤(Plato, 기원전 427~347.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조차 하나님 안에서 어떤 형상(formam in Deo)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지극히 어리석은 모습을 주목하게 된다. 즉, 모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저속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해준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의 우상으로 만들어 그분의 위엄을 더럽혔다. (나는 에라스무스가 채택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번역보다 ‘썩어질 사람’이라는 이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불멸성을 인간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 대조할 뿐 아니라 그분의 썩지 않는 영광을 참으로 비천한 인간의 상태와 대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런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도 만족스럽지 않은지, 그들은 한 술 더 떠서 짐승과 가장 저급한 종류의 우상을 만드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어리석음은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독자들은 이런 가증스러운 관행에 대한 설명을 락탄티우스(Lactantius, 240~320.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이자 저술가)와 유세비우스(Eusebius, 260~340. 가이사랴 교구의 감독이며 기독교 교회사의 최초의 저자)의 글에서,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City of God)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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