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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석_로마서

칼빈주석 로마서 1장 8-12절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8-12

 


8 먼저 내가 …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이 본문의 도입 부분은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그는 로마인들뿐 아니라 자신과도 관련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자기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는 기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논증을 시작한다.

그는 그들의 믿음이 널리 알려진 것을 생각해낸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들의 공개적인 칭찬을 받는 영예를 얻었으므로, 주님의 사도를 거절하는 것은 그들이 두루 누렸던 좋은 평판에 어긋날 수밖에 없음을 넌지시 비춘다. 그러한 행위는 신뢰를 다소 무너뜨리는 무례한 처사가 될 것이다. 그들의 명성은, 그들의 순종을 높이 평가한 바울 사도로 하여금 그의 직분에 따라 로마인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도록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 이유로 그들은 그의 권위를 얕잡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자기 자신에 관하여, 그는 그들을 향한 자기의 신실한 사랑을 증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수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한다.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우리의 관심사를 유심히 살핀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권면하는 사람이 신임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바울이 그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배우게 된다. 감사가 유익 얻은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이 그분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바울 사도가 항상 감사로 축하 인사말을 시작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복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감사의 표현 방식에 익숙해짐으로써,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좀더 강하게 일어나도록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할 것이다. 작은 복에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면, 믿음을 주신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이 감사해야 하겠는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주시는 평범한 선물이 아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여기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명령에 따라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실례를 본다. 그 명령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고 찾아야 하는지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고백은 신자들만 가지는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영예를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이 고백에는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30:22)는 약속에 나타난 상호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어구를 바울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주는 특징으로,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주님께 드린 순종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징표로서 그가 가지게 된 명성으로 한정해서 이해하고 싶다.

이사야가 참되고 신실한 선지자라는 것을 표명하고 싶어서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이사야의 하나님으로 칭한 것도 같은 경우이다(사 37:4). 또한 다니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전함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이 특별히 다니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린 것도 마찬가지이다(단 6:20).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인들의 믿음에 관한 평가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칭찬은 바울에게 온 세상의 칭찬과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믿음을 아주 몹쓸 것으로 여기고 싫어하는 불신자들의 증언은 솔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인들의 믿음에 대해 적절한 소신을 가지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모든 신자들의 입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보잘것없는 이 소수의 무리가 로마에서조차 불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바울에게는 그 불신자들의 판단이 아무런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9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그는 로마인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그 결과를 들어 입증한다. 그들에 대한 사랑이 크지 않았다면, 그는 그토록 열심을 내서 그들을 주님께 올려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직접 수고함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촉진시키려고 그토록 간절히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과 열망은 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명백하게 증거해준다. 관심과 열망은 사랑에서 나오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서 로마인들의 확실한 신뢰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신실함을 확신시키기 위해 맹세의 말을 덧붙인다.

맹세는, 어떤 주장이 확실하지 않을 때마다 그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맹세가 그저 하나님께 우리의 말에 대해 확증해주시기를 호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맹세한 것에 대해서 그 지혜를 인정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는 맹세를 했지만 맹세를 금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위반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도는 [재세례파(Anabaptists,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개혁을 따른 개신교 종파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음) 사람들이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맹세를 완전히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준행을 회복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율법은 맹세를 허용하되, 거짓 증거와 불필요한 서약만은 정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맹세를 바르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사도들이 보여준 진지하고도 존중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맹세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그분께 호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거짓 서약을 할 경우 우리를 벌주실 분으로 그분을 소환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다른 본문에서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고후 1:23)라고 진술하는 것과 같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무례한 자들이 무모하고도 뻔뻔스럽게 그분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언급한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거짓 맹세 하는 것을 망설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외형적인 신앙생활의 모양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신의 심령을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체하고 겉으로 볼 때는 정말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가 고대의 종교 의식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이 의식들을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자기가 이런 의식들을 몸에 익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그가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진술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신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섬겼다는 것을 자랑한다. 이것이야말로 참 신앙이며 올바른 예배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바울에게는 사람들이 자기의 맹세를 더욱 기꺼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헌신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했다.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거짓 맹세가 웃음거리지만, 신앙심이 깊은 자들에게 그것은 천 번의 죽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곳에는 그분의 이름에 대한 참된 존경 또한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맹세를 할 때 요구되는 신성함과 정직함을 잘 알고 있으며, 무례한 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처럼 경박하게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의 실례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맹세를 할 때는 언제나 경건의 증거를 보임으로써 우리의 선언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 합당한 신성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겉으로만 예배한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자신의 사역에서 찾아 제시한다. 그가 자신을 부인했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치욕과 가난과 죽음과 증오라는 모든 역경을 마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드린 사람이라는 완벽한 증거였다.

어떤 해석자들은 이 어구에 대해, 바울이 자기가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한 예배가 우리에게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복음의 명령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 예배를 찬양하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고 있었다는 앞의 해석이 훨씬 더 적절하다. 한편,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려 하기보다는 다른 동기를 가졌던 위선자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한다. 많은 사람들이 야망이나 그와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서, 자기들의 사역을 전혀 신실하고 충실하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은, 바울이 가르치는 자신의 직분에 성실하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헌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절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소 유용한 교훈을 추론하게 된다. 즉, 복음의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귀한 섬김을 드리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아주 큰 힘을 얻는다.

자기들의 수고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될 뿐 아니라 가장 고귀한 예배 행위로 여겨질 만큼 그분이 인정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과연 그들로 하여금 그 최고의 섬김을 그만두게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나아가서 바울은 복음을 ‘그분의 아들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알려지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이 영광을 받을 때 아버지 하나님 또한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버지께 지명을 받으셨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바울은 자기가 그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계속해서 표현한다.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대한 대단한 증거이다. 이 어구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판토테’(pantote, 항상)라는 단어를 ‘내 모든 기도에서’ 혹은 ‘내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헌신해서 드리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인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런저런 절규의 기도를 자주 드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작정하고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도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기도에’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의도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다. 주님 자신도 기도하기 위해서 물러가 쉴 곳을 찾으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에 전념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기도 습관의 빈도頻度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지속성을 표현하고 있다.


10 어떻게 하든지 … 구하노라 우리 자신의 수고를 들여서 기꺼이 돕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그의 유익을 도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정말 잘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후에, 다른 증거를 들어 그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한다.

즉, 자기가 그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것이다. ‘또한’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다음과 같이 읽으면 이 구절의 전체적인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또한 구하기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내가 어떻게 해서든 순조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의 여행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주님의 승인에 따라 그 여행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생각도 밝히고 있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더라도 그는 가르침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고란 함께 있는 사람에게서 들을 때 언제든 더 효과적이므로,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는 자기의 권고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한다. 이는 그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여행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신령한 은사’라고 할 때, 그는 자기가 소유한 전도의 능력, 권면의 능력, 예언의 능력을 의미했다.

그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나누어주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은사들의 합법적인 사용에 대해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가 나누어진 것은 모든 사람이 공동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서로를 돕고 각자 가진 은사를 서로 나누기 위함이다(롬 12:3 ; 고전 12:11).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나누어주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한 말을 수정한다. 혹시 자기가 그들을 여전히 복음의 기초들을 배워야 할 사람들로, 그리고 아직 그리스도에 대한 적절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나 않을까 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진보를 이룬 사람들도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무엇보다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르도록 견고하게 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2 이는 곧 내가 …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이렇게 겸손히 주장하고 나서도 그것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그는 자기가 그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열망도 없이 교사의 자리를 억지로 차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부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내게 주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너희를 견고하게 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본이 내 믿음에 열정을 더해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서로에게 유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미숙한 초신자들을 통해 강건해지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얼마나 겸손하게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지 주목하라. 그는 진지하게 이 말을 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영적 진보에 일정 정도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은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대적인 마음과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서 유익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기는 마음이 클 때, 그리고 어리석은 자랑으로 흠뻑 취해 있을 때,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며 자기가 필요한 것을 넘치도록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처가 그런 것처럼 나도 여기 나오는 헬라어 동사를 ‘안위하다’보다 ‘권면하다’라는 의미로 풀이하고 싶다. 그것이 문맥에 더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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