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이것은 신학적으로 좀 맞지 않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고 하면서 새삼스럽게 여기서는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셨다가 이삭을 바치는 순간 “이제 알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기 때문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중심은 보지 못하셨나? 그게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중심까지 다 아셨다. 그럼 여기서 “내가 이제야 아노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하나님이 모르셨다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향해 선포해주신 말씀이다.
“아브라함아, 이제 너는 나를 경외하는 자가 맞아. 이제부터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어떤 존재인지 그에게 직접 확인시켜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인도하실 때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시켜주시며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것도 내가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분으로부터 최고로 인정을 받는다면 그처럼 우리를 기쁘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흔히 여자는 사랑을 먹고 살고 남자는 인정을 먹고 산다고들 말한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단순한 남자들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목숨을 건다는 말이다. 얼마 전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님 목사님이 카톡방에 함께 동역하는 사역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칭찬하는 글을 남기셨다. 그때 나에게는 “불평하지 않고 항상 충성된 윤 목사”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 형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내 안에 거룩한 부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아!! 난 이제부터 불평하면 안 돼. 그리고 항상 충성되어야 해.” 참 단순한 논리지만 그렇다고 인정해주시는 분 앞에 그렇게 하고 싶은 강한 동기가 일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다. 사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진정으로 만족시키는 것은 크고 놀라운 사역이 아니다. 처음에는 어떨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역 자체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크고 놀라운 사역 이후 하나님의 사람들이 종종 내적인 공허감으로 힘들고 어려워할 때가 있다. 사역의 귀한 열매를 보고 사람들의 칭찬도 들으면 잠시 마음은 뿌듯하지만, 실상 조용히 혼자 있을 때 속에서부터 밀려오는 공허감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자칫 큰 실수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는 것이 있다. 한순간에 모든 공허감을 날릴 수 있는 것은 “아들아, 딸아,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과 그분으로부터 오는 확인이다. 그때 우리 안에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게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신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기쁨이 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다르다.
마치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하고 그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지만, 그 아들의 귀한 헌신과 순종을 보며 기뻐하고 만족하여 “와! 우리 아들, 너무 멋지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더 큰 기쁨이 되는 순간이 언제일까? 바로 순종할 때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더 기뻐하시고 순종을 경외함의 증거로 보신다(삼상 15:22). 하나님을 정말 경외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며 순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원하는가? 아주 간단하다. 그분의 뜻을 좇아 순종하라. 그분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순종이다. 왜냐하면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는데 순종이 되는가? 더 깊은 차원의 신뢰는 더 높은 차원의 순종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드리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
기도할 때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크고 놀랍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그 일에 집중하고 순종하기를 도전한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분명할 때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그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태도가 있기를 바란다. 때로는 나의 이성과 논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다시 강조한다. 순종은 결단으로 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보라. 정말 죽을 듯이 결단했지만 잘 안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결단은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삶을 재설정해준다. 그러나 그 자체로 순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순종은 순종이 가능한 영적인 상태와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적 상태와 태도는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와 체험들을 통해 그분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신뢰하기 때문에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듯 스며드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정이지만 무엇보다 가치 있는 투자라고 믿는다. 지금부터 시작하기를 도전한다. 그리고 이미 그 여정 가운데 있다면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사모하고 요청하기를 도전한다. 절대 만족하지 말라! 영적으로 더 목마르고 갈급함으로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기를 도전한다
† 말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사무엘상 15장 22절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히브리서 5장 8,9절
† 기도
하나님, 저를 안다고만 말씀하셔도 눈물이 너무 나요. 그런데 제게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주님께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좇아 순종할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고 했는데, 순종하기로 결단합니다. 결단으로만 끝나지 않고 삶에서 이루어가게 도와주세요.
† 적용과 결단
종은 영적인 상태와 태도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영적인 상태와 태도는 오랫동안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영적인 교제와 체험들을 통해 알아갈 때 스며들듯 쌓여집니다. 오늘 당신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위해 할 것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