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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없는 믿음은 없다!

순종 없는 믿음은 단지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2018-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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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진정한 철학자는 크리시포스(스토아철학을 체계화한 주요 인물)와 디오게네스(그리스 철학자로서 견유학파의 시조 중 한 사람)를 읽어서 이들의 교훈에 대해 박식한 강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교훈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에픽테토스는 실천이 아닌 것에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교만, 탐욕, 자기사랑 또는 세속적 야망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철학자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달변이나 많은 학식에 감동하지 않았다. 그의 학생들이 자기가 읽은 책의 목록을 그에게 말해봤자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그는 “네 독서가 네게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라고 물었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들의 말에서 찾지 않고 그들의 삶에서 찾았다. 배움을 위해 그를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스토아철학을 철저히 따르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면서 “철학자처럼 살겠다는 각오가 없다면 다시 나를 찾지 말라”라고 단호히 말했다. 진짜 철학자와 ‘단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정확히 구별하여 후자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는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가 있었을 뿐이고, 중간지대는 없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스토아철학의 교훈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눈먼 이교도 중에서도 일부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빛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종종 하나님의 자녀 중 어떤 이들보다 더 참된 지혜를 보여준다.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에픽테토스가 경고하는 덫에 걸려들고 있다. 즉 ‘말’을 ‘행함’으로 오해하면서, 기독교의 교훈을 아는 것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고 말씀하신 분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옛 그리스의 철학자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배우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인가?”라는 다소 불손한 질문을 자신에게 가차 없이 던지는 것이 우리의 영적 주소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인가?

우리가 정직해져야 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알기 위해 자신을 살필 때이다. 무수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안개 낀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의 눈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어버리는 편을 택한다. 그런 선택이 언제나 위험한 것이고, 때로는 치명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자기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교훈들에 순종하기 위해 겸손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을 권리가 없다. 언젠가 그리스도께서는 만족스런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라는 질문이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이다 바로 여기서 나는 일부 독자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 같은 반론 하나에 대해 언급하려고 한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계명들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율법을 지키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우리의 의를 위해 부활하셨으므로 우리가 계명들을 지킬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순종과 전혀 관계없이 오로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정직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런 식의 주장을 펴지만, 그들이 정직하다고 해서 이런 주장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이 지난 50년 동안 복음주의의 메시지를 약화시키고, 교회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내렸다. 덕분에 이제 교회의 도덕적 수준과 세상의 그것은 거의 구별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주장은 은혜에 대한 오해 때문에, 또 복음에 대한 일면적(一面的)이고 협소한 해석 때문에 생겼다. 이런 주장이 사람들을 오류로 이끌 수 있는 힘을 갖는 이유는 이 주장에 담긴 진리의 요소 때문이다. 전제는 옳지만 그 전제에서 결론을 잘못 이끌어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으로, 성경에서 언제나 함께 발견된다. 믿음으로부터 순종을 분리하는 것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전의 양면이 서로 붙어서 하나가 되어 있을 때에만 정상적인 돈으로 간주된다. 이 두 면을 서로 분리하면 동전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다.

‘믿음 ‐ 순종의 동전’에서 한 면만을 존중하겠다고 고집하면서 기독교는 무서우리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믿음이 전부가 되어버렸고, 순종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신앙인들은 도덕적으로 약해졌고, 영적으로 맹목이 되었으며,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약의 기독교에서 멀어지고 있다.

영적 진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기 전에는 그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우리의 주님이 아주 분명히 밝히셨다. 그분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라고 말씀하셨다. 의지와 행함(적어도 ‘행하겠다는 의지’)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앎이 따라온다. 진리는 엄격한 선생이기 때문에 자신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드러내기 전에 먼저 순종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진해서 하는 순종’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불가능하다. 순종 없는 믿음만을 갖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다.

† 말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장 21절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요한복음 14장 21절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 요한일서 2장 4절

† 기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행하는 자녀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게 하시옵소서.

† 적용과 결단
당신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기독교를 공부하는 사람인가요?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하며 결단해보세요.


낭독으로 만나는 테마
귀로 들어요~ 갓피플 테마. 눈으로만 읽는 것과는 다른 은혜가 뿜뿜. 테마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고 새롭게 나누어지기를 기도하며, 갓피플 직원들이 직접 낭독했습니다. 어설퍼도 마음만은 진실한 낭독러랍니다^^ 같은 은혜가 나누어지기를...




†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