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가정

겨울나무의 기다림

겨울 나무 만큼이나 앙상하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주변은 풍성하고 넘쳐 부족함이 없어보이는데.. 주변과의 비교가 더 힘들게 합니다. 아이의 문제일 때는 더 힘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날에 수없이 했던 고백인 '이 아이는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그 고백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때 우리 입술에서 진정으로 드려지길 원합니다. '주님, 이 아이의 참 아버지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등산을 좋아하는데, 특히 겨울 등산을 좋아한다.
우선 겨울의 찬 공기가 좋다. 나는 겨울에 등산할 때 옷도 일부러 두껍게 입지 않고 조금 가볍게 입는다. 처음 산에 오를 땐 춥고 으슬으슬하다가 한 5분 정도만 지나면 내 몸에서 놀라운 에너지가 발산되는데, 그럴 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 추운 날씨에 찬 공기에 맞서 열을 발산하는 내 몸을 보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겨울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다.
나는 겨울 산에서 나목(裸木)을 보는 게 참 좋다. 사람들은 4,5월에 꽃이 만개하는 향기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벌거벗은 앙상한 겨울나무가 5월의 화창한 꽃나무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1월 동토에 뿌리내린 겨울나무가 참 초라하다. 멋 부리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 오직 겨울나무가 원하는 본능은 딱 하나다. 생존하는 것. 버텨내는 것. 그 하나를 위해 아름다웠던 잎사귀 다 떨어내고 벌거벗은 몸으로 거기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초라해진 겨울나무가 내 눈에는 왜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가? 그 나무가 그렇게 겨울을 버텨냈기 때문에 5월에 아름다운 향내 나는 꽃잎들이 가능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로 그렇게 힘든가? 지금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겪고 있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는가?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있는 과정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가끔 청년들이 나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한다. 각기 사연은 다르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내용은 꽤 심각하다. 언젠가 내가 잘 아는 한 청년이 찾아왔다. 많은 아픔이 있던 청년이었다. 우울증 약도 먹고 있다고 했는데, 나와 이야기하면서 막 울었다.

“목사님, 또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제가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아요. 전 그저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너무 초라해 보여요.”
그래서 내가 겨울나무 이야기를 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보기에 너는 진짜 아름답다. 그 어려운 삶의 과정을 이렇게 잘 버텨내고 있는 것, 이 이상 어떻게 더 아름다울 수 있겠니? 껍데기만 보는 사람들의 기준과 판단에 흔들리지 마라. 겨울나무 같은 이 과정을 잘 견뎌내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꽃이 필 5월의 봄날을 기억하거라. 그날을 소망하고 비전을 가지면 반드시 인생에 꽃이 필 날이 올 거야. 그것을 삶의 소망으로 삼으렴.”

나는 아브라함이 칠십오 세 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받은 이후로 아들 이삭을 응답으로 받던 백 세가 될 때까지의 과정이 고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브라함이 내내 고통 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아들 이삭을 낳던 백 세 때부터 행복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비전을 받던 칠십오 세 때부터 내내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전으로 이어지는 믿음은, 환경을 보지 않고 꿈을 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벼텨낼 수 있는 힘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소망 때문이다. 믿음에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이십 대 초반에 시카고에서 고생하던 때가 또 떠올랐다. 나는 지금도 미국을 방문할 때면 시간을 내어 고생스럽던 그 시절에 내가 살던 작고 초라한 집을 찾아가 보곤 한다. 265불짜리 좁은 방, 삐걱거리는 백 년 된 목조건물, 바퀴벌레가 출몰하던 그곳에서 스물세 살의 내가 겪은 시카고의 겨울은 초라했다.

내가 이때의 얘기를 설교 때나 책에서 자주 하다 보니, 형제들의 입장이 곤란해졌었다. 막내가 그렇게 고생할 때 형제들은 무엇을 했냐는 얘기들을 하기 때문이다. 그건 오해다. 그때는 내 가슴이 뜨거웠을 때였던지라 도와주겠다는 것을 다 거절했었다. 내가 왜 아버지도 아닌 형제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는 생각에, 내가 벌어서 학교 다니고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걸 ‘사서 고생한다’고 하던가?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사서 고생했던’ 그 당시의 나의 결정은 참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니까 내 생애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그 과정이 나에게 너무나 유익했기 때문이다. 고생이 많아 수시로 마음이 무너지고 절망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만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던 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 저 이대로 망하지 않죠? 하나님, 저 이대로 무너지지 않죠? 저 다시 일어날 수 있죠?’라고 기도하며 주먹에 힘을 쥐던 그때가 그립다.
<오늘, 새롭게 살수 있는 이유> 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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