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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브라데 강을 넘어가라

'나의 안정적인 삶의 방식'을 떠나 '하나님의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라

 2018-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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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을 향한 데라의 여정은 불과 몇 개월 또는 길어봐야 1년을 넘기지 않고 하란에서 멈춘다. 그리고 이 믿음의 여정은 아브람이 75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감으로써 다시 시작된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데라의 나이는 145세다. 그러면 그들은 대략 20년 정도의 시간을 하란에 정착하여 지낸 것이다. 어쩌면 그 20여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데라에게 계속 임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처음 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한 사람이 데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라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그의 아들 아브람에게 임한 것이다.

이제 질문을 해보자. 데라는 왜 믿음의 여정을 지속하지 않았을까? 나이가 많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결단과 대가 지불을 하고 시작한 여정인데, 단순히 나이가 들고 힘들어서 멈춘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도상으로 보면 유브라데 강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가장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다. 반대로 유브라데 강의 왼쪽인 가나안은 어떤가? 우리에게는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리고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친숙하지만, 그 당시 이 땅은 고대 부족 사회이자 인신 제사를 드리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일어난 강 저쪽과 비교하면 아직까지 미개하고 살벌한 곳이었을 것이다. 데라도 믿음으로 담대히 여정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유브라데 강이라는 도전 앞에서 결국 포기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복음을 듣고 처음 주님을 만나 구원의 은혜를 누린다. 그 주님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자신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을 발견하고 흥분한다. 우여곡절 끝에 부르심을 좇아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지만, 결정적으로 유브라데 앞에서 대부분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이 유브라데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넘지 못하는 강이 되어버렸다.

왜일까? 쉽게 설명하자면 이 강을 기준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오른쪽은 나름 내가 주인이 되어 삶의 규모나 계획을 어느 정도 정하고 예측할 수 있는 곳으로 이따금 하나님의 도우심과 잔잔한 은혜도 구할 수 있다. 반면 왼쪽은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고 내가 주인 될 수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한 발 한 발 따라가야 하는 곳이다.

더 직설적으로 설명하면, 유브라데 강 오른편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체가 되지 못하고 늘 변두리에, 삶의 일부와 특정한 영역에만 머무시게 된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체가 되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혀 예상하거나 주도할 수 없는 삶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리기 때문이다.

유브라데 강을 넘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삶의 진정한 하나님이 되시는 삶,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그분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순종하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comfort zone’(나의 안정적인 삶의 방식)을 떠나 God’s zone(하나님의 삶의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것을 두려워한다. 대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영역에서 적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규모 있게 사는 것에 만족한다. 때때로 유브라데 강을 넘은 자들의 무용담을 듣고 대리 만족하며 지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돌파해내야 하는 것은 우리 앞에 닥치는 시험 또는 많은 고난과 어려움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도전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되시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죄의 모든 뿌리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되는 것이다. 반대로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나님 되시도록 하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두 방향을 향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2천 년 기독교 역사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 결정적인 돌파가 있었다. 그들은 이 계기를 통해 전혀 다른 삶의 수준으로 들어갔다. 믿음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다기보다 결정적인 순간에 도약하는 것이고, 또 다른 수준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망가졌던 삶을
피로 나를 사신 예수님께 드리세요.
그때 회복이 시작됩니다.

이 결정적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어떤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의 믿음의 삶을 이 땅에서 실체로 누리기도 한다. 찬송가에도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주님과 그분이 인도하시는 음성만이 분명한 사람들, 그래서 이 세상의 구조와 시스템도 컨트롤할 수 없는 삶을 살아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이런 이들을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행 17:6)이라고 표현했다. 세상의 구조와 시스템이 먹히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돌파하여 사는 이 사람들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워한 것이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네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라고 외친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 된 삶에서 ‘comfort zone’을 더 넓히고 확장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가 주인인 삶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나의 안정적인 삶을 확장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다. 터진 웅덩이를 더 넓히는 삶에서 나와 예수가 주인인 바다로 들어가는 삶,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항해하는 삶이 성공적인 삶이다.

이 항해를 하다보면 폭풍이라는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동행해주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항해의 끝은 아버지 하나님의 유업이 있는 천국이기 때문이다. 땅의 사람들이 더 큰 웅덩이를 만들어서 자랑할 때도 우리는 큰 파도와 비바람을 뚫고 천국을 향해 나아간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다.

† 말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마태복음 7장 21절

† 기도
주님, 세상은 끊임없이 “네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안정적인 삶을 위해 성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공해서 주님을 높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님이 주인인 삶으로 저를 이끕니다. 세상의 구조와 시스템도 컨트롤할 수 없는 그런 삶, 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를 이끄소서.

 † 적용과 결단
내가 주인이 되어 삶의 규모와 계획을 어느 정도 정하고 예측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도 구할 수 있는 삶. 당신도 이런 삶을 원하시나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그 반대편으로의 도전을 권합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시고 그분께 맡겨드리는 순종의 삶으로 말입니다.


낭독으로 만나는 테마
귀로 들어요~ 갓피플 테마. 눈으로만 읽는 것과는 다른 은혜가 뿜뿜. 테마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고 새롭게 나누어지기를 기도하며, 갓피플 직원들이 직접 낭독했습니다. 어설퍼도 마음만은 진실한 낭독러랍니다^^ 같은 은혜가 나누어지기를...




† 지금 교회와 성도에게 필요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