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창 32:22-32).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는데, 이 이름은 ‘하나님과 싸워(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뜻이다. 만일 야곱이 도망했다면, 그가 싸움을 포기했다면, 그는 회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망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했다.
나는 야곱에 대한 이 이야기를 회심의 비유로 사용한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상태와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의 해결책을 보여주시는 성령님과 씨름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결국 승리할 것이다.
나와 하나님의 씨름은 약 6개월간 지속되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내 죄와 구주(救主)의 필요성을 직시(直視)했다. 그것은 강렬하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나는 내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에서 도망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이 불안한지 몰랐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되면 그는 하나님과 씨름하게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씨름은 매우 격렬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의 씨름은 덜 격렬하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과 이런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위로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생각에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주는 평안 이외의 다른 평안을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사실 나도 이제까지 목회하면서 실수를 종종 범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는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들에게 “당신에게는 참된 기독교 신앙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위로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위로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내게 와서 “나는 하나님과 씨름하여 회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간증했다(이런 일이 때때로 일어났다). 내게 거짓 위로를 들은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회심하지 못하고 있을까?
이 책 앞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신념(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일은 긴장되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자기의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때 일어난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불안하고 불편한 상태에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신에게 완전히 정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은 오직 불안감을 줄여보려는 무의식적 욕구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견해에 동의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을 구원의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들이 오히려 거짓 위로와 거짓 회심을 낳을 수 있다. ‘결신(決信)의 초청’과 영접기도는 현재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거의 절대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는 다른 어떤 방법들보다도 바로 이 방법 때문에 비회심자(非回心者)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을 그냥 넘길 수 있다. 거짓 회심을 피하려면,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과 회심하지 못한 사람 모두 정직하게 판단하고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결신의 초청’을 통해 사람들을 설교단 앞으로 불러내어 영접기도를 드리게 하는 방법은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사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아주 위험스러운 것이다.
이 책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나의 회심과 목회 사역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언급하고 싶다. 나는 캘리포니아 주(州)에 있는 페어필드제일침례교회에서 설교단 앞으로 나갔을 때 떨렸다. 거기에 서 있던 어떤 집사가 나를 맞이하여 제일 앞줄에 앉혔다. 나는 두려웠다. 내가 그 집사의 견해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문제 삼을 가능성은 없었다.
어떤 진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사실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그 집사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나의 솔직한 감정에 충실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뜻에 따라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영접기도를 따라 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계속 나와 씨름하셨고, 결국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정말로 알게 되었다.
그 후 29년 동안 목회하면서 나는 설교단에서 복음을 전한 후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설교단 앞으로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초대하는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나온 사람들에게 몇 마디 말을 하고 그들에게 영접기도를 따라 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방법을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말은 내가 ‘결신의 초청’을 하지 않겠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제 나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과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가라고 권한다.
이제 나는 기계적 방법을 권하지 않는데, 참된 회심을 쉽게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적 방법이 참된 회심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전에 나는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한 시간이 내게 허락된다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시 일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당시 내가 내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한 시간 동안 얘기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설득하면 그들은 내가 볼 때 거의 전부 회심했다. 내 설득과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나와 함께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는 요청을 뿌리치면 불쾌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을 때 더욱 그랬다.
그러나 나중에 드러났듯이, 슬프게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회심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내가 회심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회심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 오라고 강하게 설득하는 이런 방법을 포기하는 것은 지금도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회심했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회심자들의 숫자를 보고하고 교인들의 수를 늘리기를 아직도 원하기 때문이다. 마치 요술을 부리듯 회심자를 만들어내고 구원을 통제하고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보란 듯이 선포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내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는 이런 내 욕망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중보자가 아니다. 예수님이 중보자이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제사장은 예수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은 예수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은 예수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나는 단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사람들을 예수께, 오직 예수께 데려갈 뿐이다. 옛날에 나는 사람들을 설교단 앞으로 불러내어 영접기도를 따라 하게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제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예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죄 씻음을 위해 그분의 보혈을 의지하고, 그분을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님과 메시아로 인정하라고 설득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서 있든 앉아 있든 어디에 있든 예수께 기도하라고 권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들에게 설교단 앞으로 나와 무릎 꿇고 기도하라고 권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들에게 예배 후에 나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니면 그 주(週) 언제라도 시간을 잡아 만나서 대화하자고 초대한다. 이런 식으로 대화의 시간이 허락되면 나는 그들에게 예수께 나아가라고 권하고, 또 회심의 객관적 징후들을 설명해준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제사장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그들에게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전할 뿐이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복음의 메시지를 진지하게 접하게 되면 하나님과 심하게 씨름할 수도 있다. 생명과 사망의 기로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싸움을 목격하는 목회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싸움인지를 분명히 인식하여, 비회심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사랑과 기도와 복음의 메시지만이 그리스도인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