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정말로 회심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자신을 살펴야 하는데, 거기에는 마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에 주목하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마지막 심판 날에 놀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지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살피면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던 때가 인생에서 몇 번 있었다. 나는 내 구원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고, 내 육체적 욕망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으며, 원수 마귀가 나를 비난했다.
이런 일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나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위로와 확신을 구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상적인 부분이고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이런 일을 겪는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신자의 영적(靈的) 성장이 방해를 받는다. 자신의 회심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어떤 경우든 간에,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는 것은 정상적 과정이다.
극적인 회심의 체험을 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한편, 경건한 부모 밑에서 소위 ‘모태신앙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자신의 회심의 시간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도 역시 구원의 확신 문제로 고민할 수 있다.
이때 회심의 정황(情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회심이 일어난 때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에 도달하는 문제와 거의 관계가 없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도 그들의 삶의 어떤 단계에서는 자신의 회심을 의심할 수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때때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내가 정말로 회심했는가?” 하면서 불안을 느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도 구원의 확신이 거의(또는, 전혀) 없을 수 있다. 이런 상태에 빠진 그리스도인은 선행(善行)을 통해 죄 사함을 얻으려고 발버둥 칠 수도 있다. 사실, 내가 그랬다.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선한 사람이 되려고 계속 발버둥 쳤다. 때때로 나는 내가 교회의 모든 고결한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을 만큼 선하지 못하다고 느끼곤 했다. 비록 내 죄가 표면으로 분명히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나에게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때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잘못 이해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신자들도 여전히 죄인인데 다만 예수님의 보혈이 그들의 죄를 덮어준다는 것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음으로 시작했으면서도 행위로 그것을 이끌고 나가려고 애썼다. 그 결과, 내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거듭난 것을 의심하면서 불안에 빠지는가?
사역의 실패, 예를 들면 목회하다가 쫓겨난 것 같은 경우가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간음, 약물 중독, 사기나 횡령으로 돈을 챙긴 것 같은 도덕적 실패를 범한 사람들도 자기에게 진정한 회심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다.
교리를 의심하는 것(심지어 일정 기간 믿음을 버리는 것), 이단종파에게 걸려드는 것, 개인의 불행, 중병, 가족이나 친구의 비극적 죽음 등과 같은 것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것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사역의 실패, 도덕적 실패, 교리에 대한 의심, 삶 속의 낙심 속에서도 예수님을 계속 믿고 의지하여 ‘결국에는’ 다시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의인(義人)은 큰 절망에 빠졌다가도 다시 예수님과 함께 서게 된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그는 떨어져 나간다.
회심의 객관적 증거들도 있다(이 책 7장을 참고하라). 회심의 객관적 징후들 중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멸하거나 무시한다.
또 예수님을 종교의 창시자 내지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 또는 선지자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또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예수님의 본질을 왜곡하여 엉뚱한 것으로 잘못 전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회심하면 예수님을 부활하여 살아 계신 구주(救主)로 믿고, 그분께 끌리고, 그분을 삶의 주인님으로 모시어 복종한다.
회심의 또 다른 징후는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회심한 사람은 ‘드러난 죄’에서 실제로 돌이킨다. 하나님의 계명이 그의 삶의 안내자가 된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명령을 들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사랑이 자라게 된다.
그는 특히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준수하게 된다. 그는 예수님과 공감하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박해를 감수할 것이다.
그리고 회심하기 전에는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면 정죄를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회심 후에는 복음의 메시지가 달게 느껴진다.
회심한 사람은 성경공부와 기도를 점점 더 원하게 된다(사실 이것은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기도로써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갈망하게 된다.
죄 사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도 역시 회심의 한 징후이다. 누가복음 7장 36-50절에는 죄인인 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께 죄 사함 받은 그녀는 예수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쏟아부어드렸다.
죄인으로 소문난 그녀는 자기의 감정을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녀는 초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으로 들어가 예수께 나아가 자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씻기고 그분의 발에 입 맞추고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
시몬과 다른 손님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천한 죄인의 만짐을 허락하신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 여인은 예수께 무척 감사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사랑과 헌신을 보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 7:48)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가? 나는 내가 언제, 어떻게 구원의 확신에 도달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더욱이, 나는 내가 구원의 확신에 도달했다고 그렇게 분명히 확신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의 확신을 주셨다고 믿는다.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만들 수 없었다. 구원의 확신은 조금씩, 조금씩 찾아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을 의지하게 된다.
놀라운 성경구절 로마서 8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靈)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사도 바울 자신도 그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11,12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않고 예수께 확신을 가졌다. 이 구절에서 ‘나의 의뢰한 자’는 ‘내가 믿은 자’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여기서 ‘믿었다’(have believed)는 동사는 ‘직설법 능동태 완료’이다.
이것은 최초의 구원의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고(바울의 경우,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무한히 지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확신함이라’로 번역된 동사는 ‘직설법 수동태 완료’인데, 이것은 바울이 그의 구원을 확신했지만 자기 힘으로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 문제는 시급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인용된 바 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경고를 다시 살펴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예수께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무서운 말씀을 듣게 될 사람들 중 일부는 분명 경건한(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종교적인) 사람들일 것이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사람들은 예언을 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기적을 행했다. 주로 능력의 은사들을 사용하여 일하는 기독교 단체들 중 어떤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성령님의 참된 은사를 흉내 내려고 애쓰는 마술사나 영매들이 여기에 해당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마술사 시몬이나 스게와의 일곱 아들 같은 사람들 말이다. 마술사 시몬은 큰 기적을 행하겠다는 욕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했고(행 8:9-25),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악귀들을 쫓아내려고 시도했다(행 19:14-16).
마지막 심판 날에 예수께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무서운 말씀을 듣게 될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거짓 회심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정말로 비극적인 일이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라. 기적을 행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알지 못하셨다. 이것이 바로 거짓 회심 때문인가? 그렇다. 그들의 회심은 거짓 회심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회심이 진짜인지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 문제를 검토한 후에 나오게 될 결과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인 경우가 종종 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주님은 저를 아십니까? 제가 주님의 것입니까? 제가 지금 주님 앞에 나온 이유는 주님이 저를 구원하시어 제 이름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미덕을 증거로 내세워 저의 구원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죄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놓으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시어 성부(聖父)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리신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이 생기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 있게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선행을 통해 죄 사함을 받으려고 애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회심을 증명하는 표적과 기사(奇事)를 찾으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이 내게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귀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증거다’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 자체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 지식과 성구(聖句)를 인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2-24
우리는 자기의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또한 자기의 부끄러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움에서 도망쳐 숨으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지금 당하는 것이 마지막 심판 날에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당신은 내가 이 책 8장에서 이야기한 목회자, 즉 자기 교인들 앞에서 ‘영접으로의 초대’에 응하여 앞으로 나온 목회자를 기억하는가?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이겼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교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것이다.
나의 이 책을 읽는 목회자 또는 교인들 중에는 자기가 회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에 숨어야 하는가? 아니면 부끄러움과 당혹감에 개의치 않고 구주(救主)와 그분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19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의 회심의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는가? 내가 사람들에게 “당신은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다음 옆면에 제시한 반응들을 보였다. 물론 그들이 말한 모든 것들은 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러나 그들의 대답에서는 그들이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깨달음이나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들의 대답은 모두 ‘행위’에 대한 얘기뿐이다. 그들은 이런 ‘행위’들을 의지해서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 각 사람들에게 조르듯이 끈질기게 질문했고, 그들의 생각을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주었다. 나는 그들이 내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또한 나는 그들이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하도록 요구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