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나는 약 5년 동안 지극히 큰 두려움과 고민 속에서 살았다. 만일 누군가 하나님의 율법을 더 두렵게 느낀다면 나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해주고 동정할 수 있다. 내가 겪은 일의 대부분은 존 번연의 책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에 들어 있다.
나는 그가 빠졌던 구렁텅이들 중 일부는 맛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내가 빠졌던 구렁텅이들 중 일부는 맛보지 못한 것 같다. 내 하늘에서는 해가 사라지고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하나님께 범한 죄가 너무 컸기 때문에 내게는 소망이 없었다. 나는 기도했다(주님은 내가 어떻게 기도했는지 아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내 기도는 조금도 응답받지 못했다.
나는 성경을 읽었다.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도 두려웠지만 복(福)을 약속하는 말씀은 더 두려웠는데, 그 복이 나와 관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나님 백성의 특권들에 대해 읽었지만, 그것들이 나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밖에 얻은 것이 없었다.
내 정신적 고통의 원인은 내가 복음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 국가에 살면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복음의 자유로움과 단순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사는 도시에서 예배가 있는 곳이라면 모두 참석했다. 하지만 복음이 온전히 선포되는 곳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현재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설교자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어떤 설교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했다. 나는 그의 설교를 즐겁게 들었다. 하지만 그 설교는 구원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싶어 하는 불쌍한 죄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 어떤 훌륭한 설교자는 항상 율법에 대해 설교했다. 하지만 충분히 갈아서 이제 씨를 뿌려야 할 땅에 씨는 뿌리지 않고 자꾸 갈기만 하는 것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 어떤 설교자는 실천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발이 없는 군인들에게 전투 기술을 가르치는 지휘관 같았다. 내가 그의 설교에서 무엇을 얻었겠는가?
그의 모든 권면은 내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지금 때때로 나는 ‘당시 어느 주일 아침에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눈보라를 보내지 않으셨다면 나는 계속 어둠과 절망 속에 있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날, 눈보라 때문에 더 이상 가던 길을 갈 수 없었던 나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는데, 그 골목 안에 작은 감리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 안에는 12명 내지 15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 아침 그 교회의 목사는 오지 않았는데, 아마도 눈에 길이 막혔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대신 초라해 보이는 어떤 사람이 설교단에 올라갔다. 그는 아마도 구두 만드는 사람이나 양복 만드는 사람 정도 되었을 것이다.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정말로 이 사람은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설교 본문에만 계속 매달렸는데, 본문 외에 다른 것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仰望)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라는 말씀이었다. 본문을 읽을 때 그의 발음이 정확하지도 않았다(물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본문을 들을 때 나는 그 본문 말씀에 나를 위한 한 줄기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정말 간단한 본문입니다. 이 말씀은 ‘앙망하라’라고 가르칩니다. 앙망하는 것은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앙망하기 위해 손가락이나 발을 들어 올려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앙망하면 됩니다.
앙망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다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1년에 10억을 버는 사람들만 앙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앙망할 수 있습니다. 어린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쉬운 것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나를 앙망하라’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심한 에식스(Essex, 잉글랜드 남동부의 주) 사투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앙망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앙망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는 위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아닙니다, 즉시 예수님을 앙망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앙망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들은 ‘나는 성령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앙망하십시오. 말씀은 ‘나를 앙망하라’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본문을 인용하여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앙망하라. 내가 마치 핏방울을 흘리듯 땀을 흘리노라. 나를 앙망하라.
내가 십자가에 달려 있노라. 보라! 내가 죽어서 땅에 묻혔노라. 나를 앙망하라. 내가 다시 살아난다. 나를 앙망하라. 내가 승천하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나를 앙망하라! 나를 앙망하라!’”
그가 그럭저럭 여기까지 얘기하니 시간이 10분 정도 흘렀고, 그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자 그는 교회 난간 아래 앉아 있던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참석자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그 교회 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매우 큰 고민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내 얼굴에는 수심(愁心)이 가득했다. 하지만 설교단에 선 사람이 내 개인적 표정에 대해 언급한 적이 전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익한 한 방이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젊은이, 오늘 설교 본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대는 언제나 비참할 것이오. 비참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 순종하면, 이 순간 그대는 구원을 얻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시오!”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리스도를 앙망했다! 바로 그때 거기서 구름이 사라지고 어둠이 물러가고 태양이 보였다! 정말 가능하다면, 나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 중 마음이 뜨거운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송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앙망하는 단순한 믿음의 소중함을 간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전에 누군가 내게 “그리스도를 신뢰하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정,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 가운데 정하신 대로 회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렇게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저를 위해 주님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그 보혈을 믿음으로 본 이후 언제나
주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은 제 노래의 주제이오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거짓 회심과 관련된 체험들
거짓 회심도 종교적 또는 영적 체험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종종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심지어 그리스도와 성경을 믿는 교회들에서)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