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회심했는가
PART2 거짓 회심한 자는..

11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

모든 사람은 종교생활을 하든 안 하든, 어떤 영적 훈련을 쌓든 안 쌓든 모두 회심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의미에서 이 장(章)의 제목은 정확한 것이 못 된다. 철저한 무신론자도 무신론 철학으로 회심한 사람이다.

어떤 사상이나 종교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제멋대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허무주의자도 회심자이다. 그러나 이 장에서 말하는 회심은 ‘참된 회심’이다.

회심하지 못한 자들의 특징들, 즉 징후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것은 믿고 어떤 것은 배척하며, 어떤 것은 소중히 여기고 어떤 것은 거부한다. 이 장에서 나는 어떤 조사나 연구를 제시하지 않고 다만 내가 여러 해 동안 해온 활발한 공적(公的) 사역과 성경의 증거에 근거하여 말하겠다.

종교적이든 아니든 간에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들과 그들의 사고(思考)와 행동의 일반적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장(章)의 목적이다. 또한 나는 종교적이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과 비종교적이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하겠다.

종교 밖에 있으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이 사람들은 기독교를 거부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이 들어본 적이 있는 종교적 교훈들이라면 어떤 형태든지 거부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와 기독교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떠도는 이야기들과 사상들을 거부한다.

종교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

종교 밖에 있으면서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중 일부는 교회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 때문에 종교적인 것은 모두 거부한다. 교회에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만간 불쾌한 일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죄 문제로 고민하고 오래된 습관이나 욕망과 싸우는 ‘구속(救贖)받은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교회, 즉 예루살렘교회도 문제들이 있었다(행 5:1-11 ; 6:1-7 ; 15:1-21 참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거나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겪은 불쾌한 일 때문에 기독교의 메시지를 거부한다. 이런 면에서 나에게도 죄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행동한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분노했는데, 아마도 그들은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왜 이럴까? 이 사람은 종교와 생활이 따로 노는구나. 이런 사람의 종교라면 믿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완전하지 않다. 우리는 최고의 기준이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지만, 사실 그분 앞에서 무색해진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신앙의 근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온전히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에서 겪은 나쁜 일 때문에 종교라면 모두 배척한다. 비단 사이비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단체, 상업 단체, 교육 단체, 또는 심리치료 단체 등에서 입은 상처 때문에도 종교를 거부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이비 종교와 그 단체가 있는데, 그것들은 자기들의 가입자들을 신속히 짓씹어서 뱉어낸다. 매년 무수한 사람들이 이런 단체들을 떠나거나 그것들에서 쫓겨난다.

만일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기대를 가졌다면, 그런 기대는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산산이 깨어진다. 그리하여 그들은 온갖 종교와 그 단체들에 대해 반감을 갖는다.

직업적 성공이 우상이 된 사람

직업이나 직업과 연관된 소문화권(小文化圈)에 지나치게 빠지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방해를 받을 수 있다. 성장기에 기독교 교육으로 양육된 어떤 생물학 교사는 대학원에 다닐 때 신앙을 버렸는데, 그 이유는 대학원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종교의 냄새만 나도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직업 세계에서 성공해보겠다는 야망으로 가득한 사람은 자기 일을 우상처럼 떠받들기 때문에 직업 세계의 동료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는 경향을 보인다[어떤 직업 세계들에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인식론)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직업 세계에서는 동료들의 압박이 영향력을 발휘한다. 왕따가 되면 그 세계에서 실패하고 집단에 적응하면 성공하는 경우들이 아주 많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희생하여 왕따를 면하라는 유혹에 넘어간다.

직업 세계에서는 배척과 불이익을 당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신앙의 좁은 길을 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

내가 오래전에 배운 노래의 가사 한 줄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준다.
“당신의 마음이 이끄는 데로 가라.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당신은 너무 멀리 갔소!’라는 말을 듣지는 말라.”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영성(靈性)을 추구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지나치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편협한 기준으로 볼 때에는 거의 모든 것이 지나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당신이 신앙의 원칙들에 충실하면 그들은 강하게 반대할 것이고, 그들의 반대는 강력한 위협이 될 것이다.

쾌락주의자

어떤 사람들은 종교의 도덕적 원칙에 어긋나는 삶의 양식을 추구하면서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를 거부한다(당연히 그들은 자기들의 삶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는 영적 교훈을 쾌락 때문에 거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 일부는 여러 가지 유사(類似) 종교적 규율들을 지키지만, 그것들은 도덕적 내용이 없는 천박한 것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의 빛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죄를 옹호하고 죄에 계속 머물기 위해 이런저런 구실들을 내세운다.

쾌락주의자들이 쾌락을 찾는 그들의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여러 해가 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이런저런 것들에 중독된 삶을 살아가다가) 쾌락에 싫증나거나 냉소적으로 변하거나 때로는 죄의식에 시달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인생이 피곤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것이다. 바로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께 끌릴 수 있다. 사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영지주의자

고대의 영지주의자든 현대의 영지주의자든 그들에게는 선악(善惡)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순수하고 만세(萬世)의 비밀들을 깨달았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에 탐닉해도 좋다고 믿는다. 그들은 영(靈)이 마음이나 영혼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육체는 아무렇게 되어도 좋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소위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용납되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내세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감추어진 신비를 깨달아 올바른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들 멋대로 살아도 좋다고 믿는다.

대개 이런 믿음은 결국 그들을 부도덕한 삶으로 이끈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리스와 로마의 영지주의자들에게서는 도덕적 자제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탐닉, 특히 성적(性的) 탐닉을 별로 허용하지 않는 문화들이 대세를 이루는 현대 사회에 사는 영지주의자들의 경우는 좀 다르다.

아무튼, 철저한 영지주의자들은 도덕적 자제라는 것에 극도로 분개하기 때문에 윤리적 교훈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볼 때 최대의 눈엣가시는 바로 기독교이다!

과학 기술 신봉자

기독교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 기술 신봉자들이 있다. 이들은 기독교를 거부하면서 대신 ‘사이버(cyber) 구원’에 소망을 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의학 기술과 컴퓨터 기술과 유전공학 기술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획기적으로(어쩌면 현재의 수명의 두 배까지라도) 연장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체 냉동 보존 기술, 즉 미래에 치료법이 개발될 때 다시 살릴 것을 기대하면서 병사(病死)한 사람을 냉동 상태로 보존하는 기술에 희망을 건다.

일부 물리학자와 인공두뇌 학자들은 컴퓨터가 불사(不死)의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한다. 그들은 결코 죽지 않는 사람들을 복제해낼 수 있는 ‘기적적인 컴퓨터’의 등장을 꿈꾼다.

일부 생물공학자들은 ‘죽음의 유전자’를 봉쇄하여 노화를 막거나 지연시키기를 꿈꾼다. 나노(nano) 기술 전문가들은 노후한 인체 장기를 수리하거나 복제할 수 있는 극소(極小) 로봇의 발명에 희망을 건다.

과학 기술 신봉자들은 종종 그들의 견해를 유사(類似) 종교적 언어로 설명한다. 과학 기술의 신봉은 영적인 것은 아니며, 초월적 하나님이 없는 종교이다. 이것은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말 그대로 ‘과학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 신봉자와 비슷한 사람들이 또 있다. 내가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에 그랬듯이, 이들은 지구보다 발달된 문명 세계의 생물체들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와서 인간들에게 질병과 죽음을 극복할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믿는다.

공상과학소설 작가들이 이런 생각을 부추기고 조장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할까봐 두려워 이런 생각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유에프오(UFO) 신봉자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먹혀들기 때문에 외계로부터 구원의 손길이 찾아온다는 얘기는 더 이상 황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실존주의자

참된 회심에서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은 아마도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들일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독특한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철저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이거나 무신론자이다. 그들은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인생이란 현재를 살면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사상은 어떤 체계나 종교적 장식(裝飾)이 없기 때문에 선불교(禪佛敎)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들에 따르면, 의미(즉, 존재의 정당화)는 문화적 규범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정직과 성실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들이 “무덤이 모든 것의 끝이다”라고 믿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무덤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것은 증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도 적어도 과학적 관점에서는 증명될 수 없다(물론, 예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은 존재한다).

만일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현재 우리의 몸으로 행하는 것들에 대해 영원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럴 경우, 나쁜 행동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서만 적당히 책임을 지면 되기 때문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생각이 지혜로운 사상일 것이다.

이런 사상이 매우 편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상으로 회심하고 있다.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humanist)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자기들의 능력을 소중히 여기는 ‘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과학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에 따르면, 인생의 의미는 실제적인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무덤이 끝이라고 믿는다. 즉, 천국이나 지옥이 없다는 것이다.

휴머니스트들은 행동가(行動家)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마음이 내키는 곳에 그들의 돈과 도움의 손길을 내놓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통해 상당한 개인적 만족을 얻고 또 인정과 존경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제한되고 불완전한 인생관에 더욱 집착하게 되어, 성경의 교훈을 신화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한다.

세속적 윤리학자

교육 수준이 높고 윤리에 대해 철학적 글을 쓰는 윤리적 무신론자들이 있다. 그들은 고전적 미덕을 소중히 여기고, 시대를 초월하는 도덕적 원리들을 신봉하며, 섬세한 윤리적 문제들을 놓고 끝없이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그들은 도덕적 가치를 세우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막연히 신(神)의 존재를 믿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의 신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편하게 느끼는 신이다. 그들은 인간들과 아무런 실제적 관계를 맺지 않는 신(神)들과 여신(女神)들을 명상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윤리적 교훈들을 연구해서 학문적으로 존경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기독교를 거부한다.

정신없이 쫓기며 사는 사람

직업, 가족, 친구, 또는 취미에 과도하게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이들은 앞에서 말한 ‘직업적 성공이 우상이 된 사람’과는 다른 부류이다). 그들은 날마다 일을 처리해나가는 과정에서 인생의 의미를 느낀다.

종종 그들은 평안과 안정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가운데 쫓기는 삶을 산다. 그들은 종교 같은 것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란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눅 4:4)라는 말씀을 모르며, 인생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예수님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는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그의 수확물을 저장할 더 큰 창고를 지어야 했다. 그리고 혼자 마음속으로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날 밤에 죽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라고 말씀하셨다.

‘알코올 중독자 치료 협회’(A.A.)에서 운영하는 12단계 프로그램 같은 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이런 사고방식에 빠지기 쉽다. 왜냐하면 이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몰두하다보면 영원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들의 최고 목표가 되며, 그들 삶의 모든 것이 오직 ‘지금 여기’에 집중된다. 그러나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러다가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중년의 사람들은 종종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데, 인생의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삶을 평가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별로 해놓은 것이 없다고 결론 내린다. 이런 결론에 이른 사람은 몸을 바쳐 추구해야 할 정치적, 사회적, 또는 환경적 대의(大義)에 매료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줄 수는 있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니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선한 일들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냉소적인 노인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인생의 황혼기를 맞으면 냉소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그리고 신체적 불편이나 질병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평생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 없이 인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만년(晩年)에 회심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나는 냉소적인 노인들을 목회 중에 보아왔다. 그들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어떤 노인들은 왠지 자극을 받아 하나님과의 평화를 찾게 된다.

특히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들은 말씀, 조부모나 부모의 간증, 또는 옛날 찬송가 가사 같은 것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튀어나와 그들을 강력하게 사로잡을 때 그렇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희망이 있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말이다.

종교적이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우리는 종교가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적’ 및 ‘영적’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종종 그들이 하나님을 성실하게 찾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저런 일들로 인하여 믿음의 길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속기도 한다.

종교적이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기독교 안에 있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이고 영적이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1. 기독교 안에 있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사랑과 공정함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는 자유주의자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공정함’의 기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판단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고 정죄하시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분이 되셔야 한다고 믿는다.

즉, 우리처럼 ‘공정함’에 대해 성숙하지 못한 견해를 가지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판단하면서, 그분이 완전하시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당신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교인들이나 지도자나 심지어 목사 중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종종 발견된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선(善)을 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성실한 사람들에게 보상하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옹호한다.

지옥과 심판과 정죄를 말하는 성경구절들을 거부하거나 무시하거나 재해석한다. 그리고 영지주의자, 힌두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같은 사람들이 선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믿는다. 심지어는 그들이 선하지 않다 할지라도 받아들이실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죄라는 것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지는 못한다고 믿는다.

물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심판과 지옥을 가르치는 성경의 교리 때문에 마음에 근심이 생길 수 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교리 때문에 수년 동안 고민했지만, 이 교리를 계속 믿는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성경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는 ‘공정함’에 대한 내 자신의 견해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하는 말들이 자유주의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럽고 황당하게 들릴 것이다. ‘거듭났다’, ‘구원받았다’, ‘주 예수 그리스도’, ‘재림’ 같은 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즐겁고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지만, 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내가 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전하는 메시지를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랑과 공정함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런 메시지를 경멸한다.

이 두 무리 사이의 대조는 극명하다. 이런 차이는 종교적이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성실하지만 회심하지 못한 교인들과 목사들이 특히 ‘사랑과 공정함의 하나님’께 끌린다. 하나님께 적용된 ‘공정함’의 개념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들의 불안을 덜어준다. 대개, 회심하지 못한 교인들은 ‘사랑과 공정함의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듣기를 좋아한다.

사랑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우상을 만든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거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제2계명(출 20:4-6 참조)을 어긴다.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이신 분, 즉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고 구원하실 수 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그 우상을 믿고 경배한다고 해서 회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무제한적으로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잘못된 개념은 그들이 회심하지 못했다는 징후이다.

흉내 내는 사람

기독교적인 것들을 흉내 내는 법을 배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은사를 중심으로 사역하는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교회들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전자(前者)의 교회들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흉내 내는 것이 더 쉬운데, 왜냐하면 그런 교회들은 예배를 열광적으로 드리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손을 들거나 성령님 안에서 노래하거나 어떤 강력한 힘에 눌려 쓰러지거나 춤을 추거나 찬양과 경배의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옳은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그가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기 쉽다. 그리스도인을 흉내 내는 것은 은사 중심적 사역을 하지 않는 교회들에서도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올바른 교리와 성경과 찬송가를 알면 사람들은 그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기 쉽다. 흉내를 내는 사람은 자기가 ‘교인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단지 그는 교회에서 늘 보아온 것을 따라할 뿐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회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이 세례를 받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소리를 지른다 할지라도 그는 회심한 것이 아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이렇게 흉내 내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종종 그들은 자기들이 단지 교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과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구별의 궁극적 기준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그리고 죄 사함과 구원을 얻기 위해 오직 그분과 그분의 십자가의 완전한 희생만을 의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향한 갈망, 염원, 생각, 행동, 소통, 그리고 교제가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비유하는 것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유용하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후 13:5

긍정적 사고를 하는 사람

소위 ‘긍정적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방식을 참된 성경적 신앙으로 착각한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들리는 얘기가 나오면 즉시 그것에 반발한다. 그들은 마귀에게 결코 틈을 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믿음이 있으면 건강해지고 부유해진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교리는 마술적 사고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다. 단지 그들이 말하는 ‘믿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들 단체 밖의 사람들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용어들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우울하고 실망스럽다고 고백할 만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언제나 행복하다.

그러나 이렇게 긍정적 사고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일이 자꾸 꼬이게 되면 종종 실망에 빠진다. 그리하여 교회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아니면 긍정적 사고가 부족한 자신을 탓하게 된다. 그들은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처럼 느끼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우울해진다.

삶의 질을 높이려고 애쓰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기를 바란다. 교회성장 운동이 이런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들, 그중에서도 특히 새로 일을 시작하려는 교회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제공하겠다고 약속하는 화려한 소책자를 발송한다.

이런 소책자를 통해, 모든 연령층과 모든 부분을 만족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광고하면서 “우리 지역의 OO교회로 와보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런 교회들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회심으로 이끌기를 바라겠지만, 교회의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에 그들의 회심의 문제는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종교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려는 사람들은 유행을 부지런히 따르는 교회로 나가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쓴다. 그들은 교회 다닐 뿐이지 예수를 믿거나 회심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을 강력하게 전하면 그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클럽을 찾는 사람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대개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은 친절하고 우호적이다. 종종, 외로운 사람들은 교회 사람들과 어울리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교회에 나간다. 이런 사람들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 교인들의 행동을 흉내 내고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지만 회심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그들은 교회에서 지도적 위치까지 올라 친구도 사귀고 인정도 받는다. 그들은 무척 경건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성가대에서 찬양하거나 제직회와 각종 위원회의 회원이 되기도 하지만, 계속 지옥 바로 옆에서 잠을 자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회심의 문제로 도전을 던질 만한 목회자가 몇 명이나 될까?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천국과 지옥의 문제보다는 하루하루 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것을 더 중요한 일로 여긴다.

전통에 매여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부모 때문에, 또는 가족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려고 교회에 출석한다. 그들의 부모나 전통은 그들에게 “네가 (적어도, 이따금)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큰 문제가 생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마음에 갈등을 느끼고, 죄의식에 쫓긴다. 그들은 그들이 성장한 교회나 교파를 의심하고 심지어 혐오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전통을 깨지 못한다. 그들은 소위 ‘부활절 신자’나 ‘크리스마스 신자’가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사람들은 자기 교파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교리를 강조하는 교파들에 속해 있다.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가족의 유대를 통하여 교회와 정서적 및 감상적(感傷的) 유대를 단단히 맺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니!

그들은 교회를 떠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괴로워지는데, 그럴 경우 식구들 사이나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미신적인 사람

이런 사람들은 마술과 기독교를 혼동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 믿었던 미신과 비슷하다.

올바른 종교적 행위를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종교적 의무를 게을리하거나 부도덕한 성생활과 마약 사용 같은 죄를 지으면 혹독한 곤경에 빠진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내가 보낸 것은 반드시 내게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그들의 구호이다. 이것은 마술적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그분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쓴다. 때때로 이런 태도는 강박적(强迫的)으로 변하여 극단적 행동을 낳는다(대개, 피하기 힘든 형벌을 모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들의 죄는 그들의 삶 속에 절망의 비를 뿌리는 거대한 구름처럼 그들 위에 떠 있다. 종종, 그들은 남들이 보지 않는 부분들에서는 매우 거룩하지 못하다. 종교적이지만 회심하지 못한 이 사람들은 복음에서 격리되어 있다. 이런 사람들이 회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감상적(感傷的)인 사람

종교적 의식(儀式)과 감상적 이야기에 특히 매료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잃어버린 강아지와 그것의 수호천사를 등장시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종교적인 감동을 얻는다. 촛불을 켜놓고 성가대의 찬송가가 멀리서 울려 퍼지는 예배를 드리면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

내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매우 다정다감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베풀고 섬기기를 좋아하지만, 복음에는 마음을 닫는다. 삶이 평안하면 그들은 걱정 없이 잘 살아가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과의 화평을 모르기 때문에 무너진다.

막연하게 예수님을 찾는 사람

끝으로 생각해볼 사람들은 막연하게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읽지만 이해하지 못한다. 가장 기초적인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종종 그들은 예배 중에 매우 불편해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이다.

예배 중에 종종 그들은 소리를 내거나, 찬송가책을 떨어뜨리거나, 화장실로 달려가거나, 아이들의 숫자를 세거나, 또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소란스러운 행위를 하는데, 이것들은 그들의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예민하다. 내가 볼 때, 그들은 자기들에게 자기들의 죄와 구주(救主)의 필요성을 보여주시는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회심에 이를 가능성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틀림없이, 내가 회심하기 시작한 날 페어필드의 교회 목회자인 로버트 루이스의 눈에는 그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내가 불편해하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당시 내가 경험한 것은 지극히 불쾌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어 예수께 이끄실 때, 바로 그때 회심의 신비가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회심은 두려움(외경심)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 예수를 나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기까지 마음의 평정을 잃게 하는 사건이다.

2. 종교적이고 영적이지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중 몇몇이 이 무리에 속하는데, 그들은 내게 심한 좌절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들은 매우 원숙하고 영적인데, 종종 나보다 더욱 그렇다. 그들은 영적인 생활이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는 데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영성(靈性)이 아닌 다른 영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종종 기독교적인 것은 모두 거부한다. 그들은 한 시간동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견디지 못하지만, 몇 시간씩 딱딱한 바닥에 앉아 명상을 할 수 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외계인, 외계인에 의한 납치, 초과학적 방법에 의한 공간 이동 같은 기상천외한 것들은 믿지만, 동정녀(童貞女) 탄생 같은 기독교의 기적은 믿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종종 예수님을 매우 존경하지만 그분의 진정한 본질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 체계에는 결국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들만이 남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길이든 모두 산의 정상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주장한다. 깨달음에 빨리 이르는 길이나 다음번의 더 좋은 환생(還生)을 약속하는 종교들에 매료된다.

기독교의 영성이 아닌 다른 영성은 왠지 평범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별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스피릿 가이드(spirit guide, 몸을 갖지 않은 영으로 존재하면서 자기의 지혜를 속세의 범인들에게 전달해주고 인간을 보호해준다는 존재)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영들과 교류하는 것에 매료된다.

그들은 사탄이 만들어내는 위조품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순진하게도 영적인 것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포장지에 넣어 비틀고 접어서 자기들의 사상 체계 속에 집어넣는다.

대개 그들의 사상 체계는 그때그때마다 바뀌는데, 때로는 점성술, 때로는 기적(奇跡) 강좌, 때로는 요가, 때로는 명상으로 바뀐다. 그들은 새로운 유행이라면 어떤 것이나 흥미를 느끼면서 “전생(前生)을 연구하는 새 단체에 대해 들어봤소?”, “모세를 불러낸다는 그 새 영매에게 가봤소?”라고 묻는다. ‘영적인 것들’을 판다는 시장(市場)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이다.

더 나쁜 것은, 일부 자유주의적 기독교 목사들이 영적인 것이라면 거의 모두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이런 목사들도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가지라고 믿는다. 이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가장 해로운 거짓말이다.

‘영적인 것들’을 판다는 시장을 헤매고 다니다가 예수께 나아와 회심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생긴다. 이런 시장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잘못된, 심지어는 위험스러운 짓을 하는 것이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가끔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