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 작곡가이자 가수인 밥 딜런(Bob Dylan)은 우리가 누군가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마귀이든 주님이든” 우리는 누군가를 섬길 수밖에 없다[〈누군가를 섬겨야 한다〉, 음반 ‘Slow Train Coming’ 중에서, 1979].
이 세상 사람들은 아주 종교적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찾아 발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행 17:22-27). 인간의 역사(歷史)를 보아도 종교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아주 쉽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인하여 서로 다른 신(神)들을 경배한다. 사이비 종교들과 이단 사상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상한 거짓 신들에게 돌아가는 개종이 일어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기독교의 회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관계를 맺게 하신다. 거짓 회심은 이런 회심을 흉내 내지만 예수님을 향한 구원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짓 회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사람이 살다가 위기를 당하면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거짓 회심에 끌리기 쉽다. 가족과의 사별(死別), 불치병, 집에 난 화재(火災),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홍수나 태풍, 이혼과 가정의 풍비박산, 실직 등과 같은 위기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상처받고 궁핍에 시달릴 때 누군가 우리에게 찾아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있다고 말해주면, 절망에 빠져 있던 우리는 그가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폭풍우를 피할 은신처를 얻은 것처럼 편한 마음을 갖는다.
이럴 때 그 누군가가 들고 온 것은 세속적인 구원, 반기독교적(反基督敎的) 구원, 기독교 이단의 구원 중의 하나이거나, 아니면 정통 기독교의 구원일 것이다.
절망의 바다에 빠져 있는 우리는 비판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있을 수 있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고통과 상실감과 혼란을 줄여주는 것을 붙들게 된다.
오늘날에는 특히 청년이나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성인들의 경우에 약물 남용, 알코올 중독, 또는 문란한 성생활 때문에 위기가 생길 수 있는데, 이런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거짓 회심을 체험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미국의 ‘예수 운동’(Jesus Movement)에서 종종 일어났다. ‘예수 운동’은 히피[반문화적(反文化的) 젊은이]들과 중산층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일어난 각성 운동이었다.
‘예수 운동’을 통해 많은 사역 단체들과 교회들이 생겨나 성공을 거두며 대형으로 성장했다. 나도 이 운동에 관여해,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활동한 한 사역 단체의 지도자로 일했다.
이런 단체들과 교회들은 광범위한 지원 체계를 통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했는데, 그들의 회심은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일어났다.
먼저, 위기에 처한 사람이 과거에 유사한 위기를 겪은 사람들의 모임에 속한 한 사람과 직접 접촉한다. 이 모임은 이 사람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조건을 붙여 받아들이면서, 그에게 죄와 반역을 회개하라고 권고한다.
이 사람은 그 모임이 원하는 대로 해줌으로써 자기의 긴장 상태를 해결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의 전폭적인 인정과 사랑과 지원을 받게 된다. 이런 과정은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그 모임의 정식 회원이 됨으로써 완성된다.
이런 사람의 간증은 주로 그의 과거의 삶과 새로운 삶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예를 들면 자신이 과거에는 마약 중독자, 도박 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지만 이제는 변화되었다고 간증한다.
그가 생활을 개선시켰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간증의 초점은 예수님과 십자가가 아니다. 그의 얘기의 초점은 그가 속하게 된 모임과 그의 행동과 감정의 변화이다.
종교적 모임, 정치적 모임, 교육적 모임, 심리치료 모임, 또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판매와 구매 동기 조사 모임 등과 같은 모임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체험에 관한 고백은 당사자의 삶이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절망적 중독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가 진정으로 회심했다고 무조건 단정할 수는 없다. 복잡한 심리적, 감정적, 또는 사회적 요인이 작용하여 그가 생활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사람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나는 이 ‘개선된’ 사람들이 정말로 회심했느냐 아니냐에 더 관심이 많다.
우리 사회는 올바른 생활, 선한 시민의식, 존경스러운 행동, 가정의 안정, 정직, 그리고 친절과 사랑을 높이 평가하지만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지도자들은 건전한 삶을 진정한 회심과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특히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거짓 회심의 덫에 걸려들기 쉽다. 내가 이제까지 목회를 해오면서 이 사실을 늘 의식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보니까, 위기에 빠져 회심한 사람들의 신앙은 많은 경우 오래가지 못했다.
물론, 위기에 빠진 사람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자기가 지옥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구주(救主)의 필요성을 느껴 예수께 나아가는 경우도 때때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있는 것이 문제이다.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접기도를 드리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주(主)와 구주(救主)로 고백하게 했을 때, 그들 중 일부는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등록했다.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 그들은 기독교를 버린 것 같았다.
사실, 참된 회심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 중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내게 “당신은 이제 거듭났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조차 깨닫지 못했다!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내 실수를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이제 나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거짓 회심의 덫에 걸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
도덕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건전한 삶을 사는 것은 선하고 올바른 일이다. 이런 삶을 살지 않을 때 결국 재앙에 직면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깨끗한 도덕적 삶은 사회의 거의 모든 계층에서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착하게 산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물론, 성경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성경적 원리들에 따라 사는 것이 나를 기독교화할 수는 있지만, 나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자기가 모범적인 삶을 산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구주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례(一例)로서 이런 사람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한 사람은 아주 깨끗한 바리새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더러운 세리였다. 이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눅 18:9)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기도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다. 기도할 때, 경건한 바리새인은 유대교 장로들의 전통을 꼼꼼히 지킨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세리는 (아마도 자기를 혐오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 가슴을 치며 오직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고 말할 뿐이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다. 예수님은 “이 사람(세리)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눅 18:14)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은 깨끗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단지 선한 삶을 살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우리의 행위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공로가 되지 못하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죄를 없애주지도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죗값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의로운 재판관 앞에 설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거듭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젊을 때 내게는 기적적 체험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끔찍한 자동차 충돌 사고에서 살아나기도 했다. 사고의 순간에, 흔히들 말하듯이 내 인생이 내 눈앞에서 번개처럼 스쳤다. 나는 그런 사고에서 살아난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셨으며 내가 내 창조주와 좋은 관계 속에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천사의 인도를 받았거나, 영적(靈的) 존재와 마주쳤거나, 기적적으로 병이 치료되었거나, 영적인 현상이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극적인 우연의 일치를 경험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왠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 무신론자였던 사람들이 특별한 영적 체험을 통해 갑자기 유신론자로 변하는 경우도 일어난다. 대개 그들은 강령회(降靈會)에 참석하거나 영매 또는 점쟁이와 접촉한 후에 그렇게 된다.
아무튼 영적 체험의 성격과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서 가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기면 반드시 교회에 나가겠다”라는 식의 소위 ‘피난처 경건’은 대개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는 성령님이 언제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거룩하지 못한 영(靈)들은 오로지 잘못 인도하고 속이고 정신을 혼란케 한다. 영적인 존재와의 만남 자체는 회심케 하는, 즉 구원하는 사건이 아니라 기껏해야 예비적 징후(표적)에 불과하다.
교회나 종교 단체의 권위에 의지하여 구원을 확신하려는 것은 거짓 회심이다. 교회나 기독교 단체는 세례를 주고(세례는 그들의 가장 일반적 의식이다), 세례명을 주고, 그들의 조직에 입문시키고, 입교문답을 한다. 사람들은 조직이 거행하는 의식(儀式)에 ‘마술적’ 힘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다시 말해서, 용서하고 구원하고 영적 깨달음을 주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힘이 조직의 의식에 있다고 믿어 의식을 의지한다. 이런 사람들은 단체나 교단의 권위에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기만 하면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나는 침례교도입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나는 감리교 신자입니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에게 유아세례를 준 교단이나 교회에 대해 적어도 명목적으로라도 소속감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소속감이 오히려 참된 회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가족의 전통 때문에, 또는 가족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특정 기독교 단체에서 떠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 단체에 속해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에 대해 전혀(또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태도를 보이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삶이 변화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어떤 교파나 교단에서 세례를 받아 소속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 아니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해 아주 분명하다. 각종 의식들, 사제의 선포, 성수(聖水), 또는 예전적(禮典的) 절차는 결코 구원을 줄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이런 것들에 집착한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특정 종교적 전통에만 구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집착한다. 그들은 본래의 종교적 소속을 버리면 그와 동시에 가족이나 친구나 지위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기독교 세계관과 성경의 교리들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다. 수준 높은 주도적 문화들을 수세기에 걸쳐 뒷받침해준 것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이다. 기독교 문화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주요 교리들을 받아들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회심은 아니다.
그들은 정통적 기독교 교리를 지적(知的)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여전히 회심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대개 정통 교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곧 회심이라고 착각한다.
내가 볼 때, 이 교리적 거짓 회심은 기독교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문화들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북아메리카와 영국과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우리나라의 모태신앙인의 경우에도 이런 문제점을 지니게 된다 - 역자 주).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교회들의 영적 쇠퇴를 낳는다. 이것은 신앙의 형식은 있지만 신앙의 본질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쇠퇴는 불가피해진다. 교회들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자기들의 진짜 상태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정말 비극이다.
기독교를 내세우는 사이비 종교들과 이단종파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의 단체에 속하여 그들의 교리를 믿어야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즉, 회심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새로 온 사람들이 그들의 교리를 놓고 갈등하다가 마침내 다양한 이유들로 인하여 그들의 주장과 교리를 받아들여 그 단체의 일원이 되면 그들이 말하는 ‘회심’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때때로 ‘자기 뜻을 굽히는 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회심은 그들의 회심과 다르다. 그것은 자기 뜻을 굽혀 어떤 단체의 교리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식(儀式)이나 예전(禮典), 가족이나 사회의 영향력, 또는 개인적 압력에 굴복하는 것도 아니다.
참된 회심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예수님과 십자가로 이끌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회심은 어떤 단체나 그 단체의 성직자를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교리들이나 단체의 신념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에게서 죄 사함과 구원을 얻었다고 믿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사람들이 “나는 미국인입니다”, “나는 러시아 사람입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런 말은 대개 태어나면서 얻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를 들어) 미국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들은 이슬람 신자, 힌두교 신자, 불교 신자, 또는 유대교 신자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사실 나도 한때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시민이기 때문에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회심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목회자나 목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생득권(生得權)은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靈)에 의해서만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게는 유대인 친구가 몇 명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진정한 유대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이슬람 신자들, 힌두교 신자들, 또는 불교 신자들도 그들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또는 어떤 종교를 갖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태어날 때 특정 종교적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에 평생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은 만인(萬人)에게 열려 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救主)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라는 말씀을 늘 명심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
그(하나님)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3,14
아이들을 겨냥한 일반적인 전도 테크닉 중 일부도 거짓 회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예수님을 여러 번 영접했다. 내가 성장했던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오리건 주(州) 포틀랜드에서 B부인이 매년 여름에 성경학교를 열곤 했다.
그 분은 체구와 목소리가 크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그 분은 아이들을 모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찬송가를 부르게 하고 비스킷과 콜라를 주었다.
그때 그 분은 거실에서 천으로 된 판 위에 펠트(felt)로 만든 세 개의 하트를 세로로 올려놓았다. 제일 위에는 검은색 하트가 있었다. 이것은 죄로 물든 마음을 상징했는데, 내 친구들과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검은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하트 아래에는 붉은색 하트가 있었다. 이것은 본래는 검은색이었으나 예수님의 보혈로 덮여서 붉게 변한 마음을 상징했다.
그 아래에는 흰색 하트가 있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원했다. 왜냐하면 눈처럼 깨끗한 마음이 없으면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흰색 하트를 원하지 않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B부인은 아이들 모두에게 기도하도록 시켰다. 매년 여름이면 내 친구들과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얀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내 친구들과 내가 했던 것은 회심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념(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우리 것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런 일은 권위와 능력이 있는 사람 앞에서나 어느 모임 안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 그 감정을 떨쳐버리기 위해 권위자나 모임의 기대에 순응할 때 종종 일어난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불안감 때문에 생긴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신념(생각)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때, 우리가 천국에 가기를 원했던 B부인은 “하얀 마음이 없으면 천국에 갈 수 없어!”라고 말해 우리에게 겁을 주어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것이다.
그 집에 모였던 아이들은 B부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지옥 불에 들어갈까봐 두려웠던 것이고, 그 분은 거짓 회심자를 낚았던 것이다. 내 얘기를 듣고 목회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생긴다. 그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그렇게 ‘결신의 초청’, 영접기도, 그리고 소박한 아동 전도 테크닉 같은 전통적 방법을 다 포기해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사역하라는 말인가?”
사실 나도 이런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거의 30년 동안 나도 ‘결신의 초청’이나 영접기도 같은 전통적 방법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다.
전통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회심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는 회심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전통적 방법을 버리는 데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매주 설교하는 것이 갈등의 연속이었는데, 왜냐하면 그전에는 설교를 ‘결신의 초청’으로 끝맺었지만, 당시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 소식지와 다른 수단들을 통해 내가 무엇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지를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의 기도와 이해를 구했다.
언젠가 나는 어떤 교회의 예배 중에 목회자가 ‘결신의 초청’을 하는 것을 듣고 설교단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떤 집사와 함께 영접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나는 당시 회심하지 못했다. 행크 해네그라프의 말에 따르면(그의 말은 이 책 2장의 서두에 인용되어 있다) 나는 회심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나는 내 상태를 인정하는 기도를 따라 했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지는 못했다. 나는 내가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내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당신은 당시 내가 300명의 교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도를 거부하고 뒷걸음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나와 함께 기도한 집사가 시키는 대로 기도했을 뿐이다.
그때 나는 복음을 접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초짜 이단이 내게 와서 “예수님은 금성에서 온 분인데, 우주선을 타고 오셨다”라고 말했어도 나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성령님은 내게 구원의 필요성을 계시해주시지 않았다(다만 나는 교회의 집사와 함께 기도를 드린 후 6개월 동안에 걸쳐 서서히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단 앞으로 나가서 영접기도를 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회심한 것은 아니듯이, 나 역시 회심하지 못했다.
나는 목사들이 그들의 교회 주일예배 때에 몇 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그럴 때 내가 좀 더 자세히 물어보면, 그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초대에 응하여 앞으로 나와서 누군가와 함께 기도했거나 때로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표시로 손을 들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럴 때 그들이 했던 설교는 많은 경우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나 회심의 필요성과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후(事後) 관리를 한다 할지라도 이야기의 초점은 대개 세례나 교회 등록이나 아니면 다른 비본질적(非本質的) 사안에 맞추어진다. 어찌하여 회심이 이토록 가볍게 취급되는가? 짧은 기도를 드리거나 손을 들기만 하면 회심의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많은 교회와 교파는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영접으로의 초대’를 전통적 방법으로 간주하며, 심지어는 이것을 사용하기를 은근히 요구한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방법을 사용하면 회심을 ‘쉽고 편리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이 우리의 교회들에서 전통으로 굳어졌지만, 사실 성경에는 이런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어 비성경적 방법을 버려야 한다. 내가 왜 이토록 가혹한(심지어는, 비판적인) 말을 하는가? 그것은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지 못한 채 기도를 입으로만 따라 하고 세례를 받고 교인으로 등록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어 그들에게 그들의 진짜 상태를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장차 예수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교인 숫자를 늘리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자들’을 회심으로 이끌어 하나님께 영원히 사랑받게 하겠다는 열정으로 불타야 한다.
사람들을 설교단 앞으로 나오게 하여 영접기도를 드리게 하는 전통적 방법이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나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 문제를 간단히 언급했지만, 이제는 좀 더 깊이 다루려고 한다.
19세기 중반의 탁월한 부흥사 찰스 피니는 그의 책《부흥론》으로 복음주의적 교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긴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 하나님나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 언제라도 예수님을 영접하기로 결단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말하자면 그는 ‘결단주의’를 가르친 것이다.
결단주의는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계시하시는 성령님의 사역과 관계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찰스 피니는 우리가 ‘제단으로의 부름’(결신의 초청)과 영접기도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런 방법이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보이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모방했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새로운 방법’은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심장부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D. L. 무디로부터 빌리 그레이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많은 위대한 복음전도자들이 찰스 피니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에 따르면, 설교단 앞으로 나와 (신학적으로 정확한) 영접기도를 드리면 회심하게 된다.
물론 나도 설교단 앞으로 나와 영접기도를 드리는 사람들 중 일부가 정말로 회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 방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회심의 과정에 대해 가진 선입견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동기들 때문에 ‘제단으로의 부름’에 응해 설교단 앞으로 나아온다. 종종 그들은 감정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으며, 영접기도를 따라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있다.
찰스 피니로부터 빌리 그레이엄에 이르는 복음전도자들도 설교단 앞으로 나와서 영접기도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 모두 회심하는 것은 아니라고 기꺼이 인정했다. 그런데도 이 방법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 장(章)을 쓰다가 어떤 성가(聖歌) 음악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음악회의 첫 곡은 〈나는 예수님을 선택하기로 결단했다〉라는 노래였다. 대규모 성가대가 뜨겁고 장엄하게 이 곡을 부를 때 청중은 크게 감동했다. 나도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곡의 가사가 신경 쓰였다. ‘선택한다’나 ‘결단한다’ 같은 말들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과 ‘결단’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죄 때문에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 못하고 죽어 있는 사람이 선택하고 결단할 수 있는가?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그 노래를 만든 사람과 성가대의 많은 사람들과 청중 대부분은 그런 능력이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가사에는 “내가 한 것을 보라! 내가 예수님을 선택했다”라는 말도 있었다.
이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노래에는 자기 자랑의 요소도 들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意志)를 가볍게 여기고 인간의 의지를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나쁜 것은, 예수님을 선택하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내가 오직 결단했을 뿐인데 회심했구나!’라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교회성장 세미나를 몇 군데 참석해보았다. 세미나 강사들은 교회에 새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다양한 테크닉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했다.
또한 내게는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하여 교인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도록 돕겠다는 세미나나 집회를 광고하는 인쇄물이 정기적으로 배달된다. 이런 방법들에는 불특정(不特定)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소책자와 전단을 연속으로 발송하거나, ‘이 멋진 세상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는 법’ 같은 자기계발(self-help) 방법을 강조하는 설교 시리즈를 보내는 것이 포함된다.
교회성장 세미나 관계자들은 교회에 새로 오는 사람들이 환영받는다고 느끼도록 격려하고 감동을 주고 도와주는 짧은 설교를 하라고 조언한다. 부정적으로 들리는 설교, 특히 죄와 지옥과 예수님의 유일성(唯一性)을 말하는 설교는 피하는 것이 좋다는 충고도 곁들인다. 그들은 이렇게 강조한다.
“주일 아침의 ‘축제’는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을 수 있는 깔때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 대규모 모임에서는 복음을 증거하지 말고, 오직 소모임으로 모였을 때만 복음을 증거하세요.
비유로 말하자면, 대예배는 깔때기의 넓은 입구 부분이고, 소모임은 깔때기의 바닥 구멍에 해당합니다. 교회에 새로 온 사람이 소모임에 참석하게 될 즈음에는 다양한 수준의 사회적 및 감정적 유대가 생기기 때문에 회심을 위해 좀 더 철저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교회성장 방법론을 읽을 때 나는 이단종파의 새신자 충원 테크닉이 생각난다. 대개 이단종파는 공적 집회를 열 때에는 그들의 의도를 숨긴다(특히, 대중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준 사이비 종교일수록 더 심하다).
일단은 가장 좋은 면을 보여주면서, 새로 온 사람을 소모임으로 끌어들여 어느 정도 감정적 유대가 생긴 후에 비로소 그들만의 교리들을 제시한다.
교회가 공적 예배 때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단지 소모임 때에 전하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바로 이런 이단종파의 새신자 충원 테크닉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런 테크닉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통계를 봐도 교회성장 방법을 사용하면 교인의 숫자가 느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교회성장 테크닉을 반박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재 전국에서 교회들은, 최대한 많은 프로그램과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교회를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교회성장 테크닉을 사용하는 이런 대세에 편승하지 않는 교회들은 교인들을 잃는다.
교회가 거창한 행사, 악단과 리드 싱어(lead singer)와 특별 찬양단의 현대적 찬양, 아동용 프로그램, 이 세상의 온갖 기능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기계발 모임 등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많은 교인들이 다른 교회들로 옮겨간다.
자신의 삶을 향상시킬 방법을 찾고 있는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교회들을 찾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 다시 화목해지거나 직업적으로 안정되거나 또는 새 친구들을 얻음으로써 삶의 질이 높아질 수는 있겠지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 즉 구원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
교회들이 교인이 되는 길을 쉽게 만들어버린다면, 교회성장 테크닉은 거짓 회심을 낳을 수 있다. 설교자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면 사람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복음 선포에 소극적으로 변할 수 있다.
회심의 필요성을 직설적으로 강조하는 설교자는 교회성장 테크닉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설교자보다 외형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분명한 복음 증거는 종종 사람들을 쫓아버리지만 교회성장 테크닉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회심을 강조하는 설교를 전할 때 단순히 기독교화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기의(自己義)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로 나아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을 면할 수 없다는 진리에 직면하면 뒷걸음치게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일부 교회들은 기존 교인을 계속 붙들어놓고 또 새 교인을 모으기 위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교회에 잘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 시민입니다.”
그러면서 무조건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한다. 사실 나도 과거에 그렇게 했으며, 지금 내 주변에도 그렇게 하는 목회자들이 일부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설교자는 교회의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해서는 안 되고,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해야 한다”라는 스펄전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거짓 회심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참된 회심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거짓 회심이 어떤 것인지를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다음 장(章)에서는 참된 회심과 거짓 회심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체험들을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