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나는 내가 이해하는 ‘고전적 회심’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하겠다. 내가 말하는 ‘고전적 회심’이란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표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 회심이다.
나는 회심에 대한 간증들을 많이 읽었다. 각각의 간증들이 모두 독특했지만 그것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었다. 이런 특징들을 보이는 회심이 ‘고전적 회심’이다.
물론, 내가 제시하는 ‘고전적 회심’에 딱 들어맞지 않는 회심의 체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회심의 과정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미 회심의 과정을 통과한 사람이 훗날 돌아보고 자신의 회심을 자각(自覺)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것도 때로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자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찾아내실 때 회심은 시작된다. 성령님은 우리가 지옥의 정죄(定罪)를 면할 수 없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신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렇게 우리의 종교적 행위와 선행(善行)이 구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절망에 빠진다.
하나님의 영(靈)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구주(救主)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예수께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죄 사함과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예수께 나아갈 때, 회심은 성령님을 통해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어난다.
회심의 신비를 살펴보자. 성경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는 말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명이 없다. 다시 말해서, 회심의 방법은 설명되지 않았다.
성경이 어떤 것에 대해 침묵하면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말로 그 침묵을 메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영접기도를 드리는 것 같은 특정 방법은 회심의 신비를 인간의 방법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될 수도 있다(회심의 신비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알려면 이 책 2장을 참고하라).
많은 회심들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물론, 모든 회심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아간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나아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 다가가 그분과 대화를 나눈다.
성자 하나님이신 그분은 천국에서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분께 나아가 대화를 나눈다. 죄에 빠져 지옥을 면할 수 없는 절망적 죄인이 그를 받아들여 용서해주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구주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가능하게 해주시는 인격적 의사소통이다. 회심은 성삼위(聖三位) 하나님께서 모두 참여하시는 과정이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 볼 때, 회심은 어떤 정형(定型)에 집어넣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양으로 일어난다. 죄를 깨닫고 깨어난 죄인이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할 때 회심이 많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와는 아주 다른 모양으로 일어나는 회심도 많다.
존 웨슬리의 회심은 오랜 고투(苦鬪)의 과정을 통해 일어났다. 런던의 앨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린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었다.
이 서문에는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는지에 대한 루터의 묘사가 들어 있었다. 웨슬리는 이 루터의 말을 듣는 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한다고 느꼈다. 즉,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다. 그분이 바로 내 죄를 제거하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 한 예로, 스펄전은 10대의 나이에 자기의 죄와 죄 사함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껴 영적(靈的)으로 낙심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감리교 소속으로서 교육 수준이 높지 않은 어떤 평신도 설교자가 설교단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시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회심했다(스펄전이 자신의 회심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한 것을 옆면에 싣는다).
거짓 회심도 종교적 또는 영적 체험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종종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심지어 그리스도와 성경을 믿는 교회들에서) 일어난다.
‘성령님을 느끼는 것’을 강조하는 교회들에서 사람들은 영적 체험을 회심으로 착각할 수 있다. 성령님과 교류할 수 있는 것같이 보이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는 자기 몸이 천사의 날개에 스치거나 어떤 영적 힘에 의해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의 펼쳐진 성경 속으로 기름이 똑똑 떨어질 수도 있다. 또는 주님의 향기를 맡거나 어떤 힘에 눌려 바닥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심지어 성령님 안에서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영적인 것과 접촉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느낀다면 그는 자신을 회심한 사람으로 보기 쉽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구원을 위해 예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영적 체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없다.
영적 훈련과 실천의 시장(市場)에는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큼 가슴 설레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영성(靈性)이 여러 가지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영성의 길들’을 따라서 활동하는 강력한 영적 힘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찾았다는 확신을 심어주기도 한다.
경외심을 체험하는 것도 영적 체험의 하나로 간주되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체험을 맛본 사람은 자기가 올바른 ‘영성의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종종 나는 종교적 경외심으로 인하여 거짓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을 보았다.
최근에 나는 어떤 큰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곳 교인들은 거의 전부 40세가 넘었다. 예배 때 리드 싱어를 중심으로 몇 명이 노래하는 로큰롤 악대가 등장했다. 그들의 연주를 들으니 우리 세대가 과거에 샌프란시스코의 골든게이트 파크에서 히피 음악을 듣던 때가 기억났다.
한 시간 내내 그들은 성경구절을 가사로 삼아 만든 로큰롤 곡조의 감미로운 노래를 연주했다. 나는 그 연주가 그 도시 최고의 볼거리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감상했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예배는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았고, 사람들은 그것에 끌렸다.
그러나 그 예배에는 복음 증거가 없었고,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한 언급 자체도 거의 없었다. 다만 예배가 끝날 무렵에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와 기도하라고 부르는 열의 없는 짧은 초대가 있었을 뿐이다.
예배의 음악과 자유로운 분위기는 좋았지만, 그들에게 제시된 것은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이 심정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그들의 예수’였다. 그 예배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음악의 짜릿함을 또 느끼기 위해 교회를 찾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람들은 떠들썩한 행사를 거행하며 ‘주(主)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을 강조해왔다. 물론 나도 이제까지 주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살아왔다. 비록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시간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그런 시간이 찾아오면 환영한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과의 관계보다는 ‘주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리는 경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오로지 즐거운 시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식을 응석받이로 만드는 지나치게 관대한 부모 같은 분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만일 그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경배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을 위해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우상 뒤에는 마귀가 있다(고전 10:18-20).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 안에서 큰 행사를 벌이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서 잘못된 것이 생기면 사탄은 즉시 파고든다.
함께 모여 경배하면서 주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회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설교자가 복음을 분명히 전하고 사람들에게 예수께 나아와 구원을 받으라고 외치지 않는다면, 회심하지 못한 채 경배와 찬양의 모임에 참석하여 즐거워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회심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경배하며 주 안에서 즐거워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러나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온 힘을 다 쏟아 요란스럽게 경배하며 찬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참된 회심의 체험과 거짓 회심의 체험은 다양한 모양들로 나타나지만, 어떤 점들에서는 아주 비슷하게 보인다. 그것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고려하며 당신의 마음을 잘 살펴라.
그리고 당신이 경건을 흉내 내며 교회를 놀이터 삼아 즐겁게 놀았다는 깨달음이 찾아오면,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던진 바울의 명쾌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