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어느 주일 저녁, 나는 뉴멕시코(New Mexico)의 한 대형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말씀을 전했다. 집회가 끝나기 직전에 나는 평소에 하던 대로 ‘영접으로의 초대’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번성하는 대형 교회의 목회자가 중앙 복도를 통해 강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았고, 그 교회에서 15년 동안 목회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구원을 위해 예수께 나아간 적이 없습니다. 오늘 밤에 비로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나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 말고 강단 앞으로 나온 다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와 단둘이 앞에 서게 되었다. 나는 그 정직하고 용감한 목회자와 함께 기도했다. 나는 그가 그날 밤에 진정으로 거듭났다고 믿는다.
이렇게 당혹스러운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목회자는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신학교에서 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겠다고 했을 때, 관계자들이 그에게 기독교 교리와 그의 소명과 회심에 대해 질문했을 것이다.
그는 복음을 수백 번 전했고, 그의 설교를 들은 군중에게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하라는 초대를 수백 번 한 사람이었다. 그 모든 것을 했지만, 진정으로 회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영적인 일들을 다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튼, 그 목회자에게는 그때까지 진정한 회심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똑같은 일들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보았다. 목회자들, 장로들, 그리고 교인들에게서 말이다. 만일 당신이 목회자라면, 또는 교회에서 오랜 세월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당신도 이런 일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거짓 회심의 가능성에 대해 이미 언급하셨다. 그분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가 네 곳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막 4:1-20). 그 비유에서 씨는 길가에, 흙이 얕은 돌밭에, 가시떨기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다.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씨는 말씀, 즉 복음의 메시지를 상징한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씨가 길가에 떨어진 것과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말씀의 씨가 뿌려지지만 사탄이 즉시 와서 말씀을 빼앗아간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일시적으로는 그들이 회심했다고 오해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나도 전에는 교회를 다녔습니다만, 나중에 불교로 개종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 안에서나 산꼭대기에서 황홀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마약에 취해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초월적 체험을 하는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든 간에, 그 나름대로 종교적 체험이나 신비한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예수께 돌아가는 참된 회심인가? 어떤 영적 또는 종교적 현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거짓 회심을 체험한 것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두 번째 경우는 씨가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다. 이 경우,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막 4:16). 하지만 그들의 반응에는 뿌리, 즉 깊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어려움이나 핍박이 생기면 “곧 넘어진다”(막 4:17).
그렇다면 이것이 진정한 회심인가? 그렇지 않다. 나름대로 어떤 체험이 있기는 했지만, 회심은 없었던 것이다.
이 경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넘어지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카브달리조브타이’(skavdalizovtai)는 “실족(失足)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
이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어려움이나 박해를 받으면 실족하게 된다. 복음을 처음 들을 때 느꼈던 기쁨이 시련을 이겨내도록 지탱해주지 못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복음을 들을 때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고 설교단 앞으로 나오고 넘어지고 영접기도를 따라 하고 열심히 찬양한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복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찾아내어 설득하면 그들은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변명을 늘어놓거나 다음에는 꼭 교회에 오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들은 거짓 회심을 한 것이다.
거짓 회심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는 자기가 회심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하지만 그 후에 ‘내가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예수를 믿어야 할 필요는 없다’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과 복음으로 인하여 친구들, 가족, 또는 동료들에게 핍박을 받으면 그들은 즉시 넘어진다. 그들은 종종 내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게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참된 회심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비유의 세 번째 경우에서는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진다. 이것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結實)치 못하게 되는”(막 4:18,19) 경우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조금 자라다가 잡초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식물과 같다. 열매가 없다면 회심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열매 없이 지내는 기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은 참된 회심을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입증된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16-19절에서 이런 교훈을 전하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마 7:16-19
주님은 이 말씀의 결론으로서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비유의 네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막 4:20)이다. 물론 참된 회심을 한 사람들만이 이렇게 될 수 있다.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심기고 뿌리를 내리고 역경과 박해를 견뎌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경건한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거짓 회심의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예수님은 자신을 대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主)라고 부르고 또 그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한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할 것이라고 암시하신다. 그들은 가장 두려운 말씀, 즉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읽을 때 나는 우리 교회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이 장차 이 무서운 말씀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리하여 회심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설교를 하면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이 도전과 충격을 받을 것이며 교인들이 움츠러들 것임을 알았다.
그렇지만 나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내 의무라고 느꼈다. 내가 내 의무를 다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회심하지 않으면 지옥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께 나아갈 것이고, 이미 회심한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도 바울은 거짓 회심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던 중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밀레도의 해변에서 만나자고 청했다. 장로들이 왔을 때 바울이 한 말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압니다”(행 20:29,30).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은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할 것이었는데, 하나는 외적 위험이고 또 하나는 내적 위험이었다. 외적 위험은 ‘흉악한 이리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었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에 ‘에이스’(eis, ‘안으로’라는 뜻)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흉악한 이리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 이리들이 어떻게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인가? 바로 거짓 회심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들은 세례를 받았을까? 그들은 주님의 만찬에 참여했을까?
그들은 교회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까?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거짓 회심을 통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교회가 직면하게 될 내적 위험은 바로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생겨서 제자들을 끌고 나갈 것이었다. 비록 성경본문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추측건대 그들은 에베소교회에서 나름대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가르치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지도자든 아니든 간에 그들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교회 안에 있게 된 것은 역시 거짓 회심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런 일은 참된 회심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나름대로 경험이 있는 목회자라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경고한 일을 겪어보았을 것이다. 바울은 이리들과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이 회심한 자들인지 아닌지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는다.
참된 회심을 거친 그리스도인들도 갈등하고 발버둥 치고 실패하고 심지어 완고하게 반역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들이 회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개나 소나 다 회심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내가 볼 때, 흉악한 이리들과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울은 그들을 진정한 회심자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교회의 원수로, 따라서 하나님의 원수로 보았을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교회에도 거짓 회심자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중에 편당(偏黨)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 11:19)라고 말했다.
여기서 핵심적인 말은 ‘옳다 인정함을 받는 것’[헬라어로는 ‘도키모이’(dokimoi)]인데, 이것은 ‘시험을 통과해 인정받은’, ‘진짜라고 판명된’, 또는 ‘참된’을 의미한다.
내가 볼 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진정으로 회심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자들, 즉 진짜라고 판명되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교회 안에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도 세례를 받을 때 그들의 믿음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을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기로 소문난 교회였는데, 그렇게 된 이유들 중 하나는 교회의 일상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 일부가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거짓 회심에 대하여 언급한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 2:18,19
1세기에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교회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교회의 교리를 부정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교회에 속했다면 교회에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그들은 어떻게 교회 안으로 들어왔는가? 내가 볼 때, 그들은 거짓 회심을 체험했던 것이다. 이 거짓 회심이 참된 회심과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교회는 요한의 설명 없이는 그것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이 언급하는 적그리스도들은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이라고 해석된다. 그들은 교회와는 다른 사상을 가졌지만, 기독교의 용어들과 상징들을 그들의 이단 사상에 교묘하게 끌어들였다.
그들은 기독교의 말씀과 교리의 진정한 의미를 자기들의 입맛대로 멋대로 해석함으로써 신조(信條)를 만들어내고 세례도 받고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러자 교회는 그들이 회심했다고 오해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과거의 교회처럼 종종 오해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통신학을 주장하고, 보수적인 성경관을 가지며, 도덕적으로 생활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회심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종종 목사들은 올바른 믿음을 갖고 올바로 행동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리를 인정하고 도덕적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을 주지도 못하고 보증하지도 못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그것은 진정한 회심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거짓 회심에 대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다음 장(章)에서는 거짓 회심이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해 살펴보자.